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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의 향연] "당신을 보면 늙는 게 두렵지 않습니다"

바람아님 2019. 7. 4. 16:12

(조선일보 2019.05.16 권지예 소설가)


팔순 앞둔 선생님… 당신은 제 인생의 선물
여전히 맑은 인품과 풍부한 삶 "우린 지금도 인생을 배웁니다"


권지예 소설가권지예 소설가


언제부턴가 선물에 대해 오래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얼마 전 어버이날에 선물로 현금을 드렸다.

인터넷으로 본 통계에서도 부모님이 제일 좋아하는 선물 1순위가 현금이라고 한다.

찾아뵙지 않더라도 요즘 부모님은 '현금 지금 입금'이란 3금 문자를 제일 좋아하신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뭐니 뭐니해도 머니'라지만 마음 한쪽에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진다.

가장 좋아할 선물을 하기 위해 며칠을 궁리하고 몇 시간 발품을 팔았던 그 사랑의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꼭 필요하거나 남몰래 원했던 걸 선물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선물보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감사의 마음은 또 얼마나 행복감을 주었던가.

선물은 액면가가 정해진 지폐가 아니라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이 그 가치를 표현하는 백지수표다.


그런 선물의 묘미를 극적으로 다룬 오 헨리의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에는 가장 쓸모없는 선물을 한 바보 같은

부부가 나온다. 너무도 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세상 누구보다 컸던 짐과 델라.

돈이 없는 부부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몰래 팔아 상대가 좋아할 선물을 기쁘게

준비한다. 델라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잘라서 판 돈으로 짐이 아끼는 시계에 달아줄 시곗줄을 사고,

짐은 대대로 물려받은 시계를 팔아 아내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위해 예쁜 빗을 산다.

선물을 풀어보았을 때 서로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팔았지만, 서로에게 쓸모없는 선물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 하지만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마음을 선물한 두 사람은 눈물 어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가장 귀한 선물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어제 15일은 스승의날이었다. 학창 시절은 지났지만, 운 좋게도 내게는 아직도 내 인생의 스승님이 계신다.

교내 신문기자로 활동했던 여고 시절에 국어 선생님이자 신문반의 지도 교사셨던 H 선생님.

신문반 선배들과 친구들 다섯 명이 10년 전부터 1년에 두어 번 그분과 소중한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40년 전 젊은 선생님은 어린 우리에게 문학뿐 아니라 기자로서의 문제의식을 일깨우고,

연극이나 공연에도 여러 번 초대해주셔서 문화적 감수성과 교양을 넓혀주셨다.


세월이 흘렀어도 다시 만난 선생님의 맑은 인품과 따스하고 풍부한 삶은 변함없이 그윽해서 행복과 위안을 느꼈다.

곱게 나이 드신 외모와 조용하고 온화한 말씀에도 가슴속에는 문화나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항상 간직한 선생님.

그 덕에 영원히 늙지 않을 순수한 청년을 만나는 우리는 여전히 가슴 설렌다.

단체 카톡에 간혹 올리는 평론가 뺨치는 영화평과 서평, 제자들보다 예술과 문화에 대한 더 깊고 폭넓은 조예와 감수성으로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는 선생님의 조용하나 풍성한 삶은 더욱 존경스럽다.

그리고 인생을 앞서 산 분으로서 지혜로운 통찰이 담긴 짧은 몇 마디의 말씀에 우리는 지금도 인생을 배우고 있다.

환갑이 다 된 제자에게 팔순을 앞둔 선생님은 영원한 선생님이다. 선생님을 보면 늙는 게 두렵지 않다.

선생님의 존재 자체가 내 인생의 선물인데, 선생님은 제자들과 소박한 모임이 끝나면 매번 제자들에게 센스가 넘치는

작은 선물을 나눠주신다. 책이나 커피 원두, 에코백, 엄선한 인생 영화를 담은 USB….


그런 선생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던 특별한 선물이 기억난다.

"예전에 아침에 출근하면 책상 위에는 항상 한 학생의 편지가 놓여 있었어.

그 아이는 편지지에 일련번호를 매겨가며 매일 그 편지에 하루하루 자신의 이야기나 감상을 적어놓았어.

나는 그걸 소중하게 차례대로 보관했었지. 세월이 지나자 아주 묵직하게 쌓였지.

그런데 그 친구가 졸업을 하고 한참 후에 결혼한다는 연락을 해왔어. 꼭 가보려고 했는데 일이 있어서 못 가보았지.

나중에 그 제자와 남편을 만났어."


선생님은 그 제자가 소녀 시절에 보낸 편지를 모아 예쁘게 리본으로 묶은 상자를 그녀와 남편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한 소녀의 눈과 감성을 여과한, 그녀와 함께 성장한 인생과 세상과 감정이 행복한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편지들. 선생님은

새신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보게. 자네의 아내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이 안에 다 들어 있다네."


청탁금지법인 김영란법 시행 이후 일선 교사에게 선물은커녕 꽃 한 송이 달아 드리지도 못하는 스승의날.

감사와 사랑을 마음에 담은 정성스러운 손 편지를 선물로 드리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