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22, F-35, B-2…. 미국과 적대하는 국가의 지도자라면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질릴 미국 공군의 첨단 군용기들이다.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 스텔스 성능을 앞세워 사전 징후 없이 표적을 타격하는 미 공군의 위력은 이란, 북한 등 반미 성향 국가를 압박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여기에 미 해군 핵추진항공모함에서 운용하는 전투기까지 더해지면 중소 국가 하나쯤은 초토화할 수 있다.
그런 미국이 외국에서 운용중인 노후 전투기 구입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 외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스위스로부터 F-5 전투기 22대를 3970만 달러(약 462억원)에 매입하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 1978년 스위스에 처음 인도된 이후 40여년 동안 사용됐고, 미국 정부가 과거에 판매했던 전투기를 되사들이는 이유는 뭘까.
◆폭증하는 美 가상적기 소요
미국이 노후 전투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가상적기를 확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각국 공군은 공중전 및 방공전투 능력을 높이기 위해 적기 역할을 맡는 항공기를 훈련에 투입하고 있다. 한국도 북한 공군 전술을 쓰는 가상적기 부대를 운용한다.
미군은 화려한 색상의 디지털 위장무늬를 갖춘 F-16, F-5 가상적기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민간 용역회사에 가상적기 역할을 맡기는 경우도 많다. 이 회사들은 자체적으로 전투기를 운용하면서 미 공군과 해군, 해병대를 대상으로 가상적기 서비스를 제공한다. 계약 규모가 크고 원가부담은 적은데다 할리우드 영화촬영 지원 등에도 활용이 가능해 수익성이 높아 미군을 대상으로 영업활동을 펼치는 업체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지난해 6월 드라켄 인터내셔널은 미 공군과 5년간 2억5000만달러(2900억원) 규모의 가상적기 용역 계약을 맺었다.
네바다주 넬리스, 애리조나주 루크 공군기지 등을 중심으로 공군과 해병항공대에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드라켄 인터내셔널은 레이더를 갖춘 A-4 공격기와 L-159E 경공격기, 미라지 F1 전투기와 치타 전투기를 비롯해 미그-21 전투기, MB-339 경공격기 등 110여대의 군용기를 갖고 있다. 숫자만 보면 브라질, 칠레 등 남미 국가 공군력과 비슷한 수준이다. 또다른 용역업체인 에어 USA도 영국제 호크 훈련기와 미그-29 전투기 등을 운용중이다.
문제는 부품 공급 등의 문제로 미국에서 유럽, 러시아제 전투기를 운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데 있다. 부품 확보 문제는 가상적기 가동률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 미군으로서는 훈련에 차질을 빚게 되는 셈이다.
F-5는 미군 규격에 맞춰 제작된 전투기로 저고도 기동성이 뛰어나다. 미군 조종사들이 쉽게 접하지 못한 기종이다. 구조가 간단해 정비가 쉽고 운영유지비도 저렴하다. J85 엔진을 비롯한 주요 구성품도 미국 내에서 여전히 생산중이며 정비 전문업체도 활동하고 있다. 미국 유나이티드 에어로노티컬 코퍼레이션(UAC)의 경우 F-5를 비롯한 노후 군용기 창정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S-2와 P-3 해상초계기를 산불 진화 항공기로 개조해 판매하고 있다.
다만 F-5는 냉전 시절 미국이 우방국 원조용으로 만든 전투기라 미국 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외국에서 사용중인 기체를 구매해야 하는데, 민간 업체가 사들이기에는 신뢰성 등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미군이 구매한 뒤 민간 가상적기 업체에 불하하는 방식으로 F-5가 공급될 것이라는 게 관련 업계의 관측이다. 업계 관계자는 “요르단 공군 F-5는 상태가 좋지 않아 대상에서 제외됐다”며 “태국 공군 F-5는 성능개량이 충실히 이뤄진 기체라 향후 추가 소요가 있다면 2030년쯤 재구매 대상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기본을 잊으면 ‘공군의 봄’은 금방 끝난다
미국 내에서 가상적기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것은 가까운 거리에서 교전하는 근접 공중전에 대한 관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 공군과 해군, 해병항공대는 강력한 스텔스 성능을 지닌 F-22와 F-35를 앞세워 세계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다. F-15와 F-16, F/A-18은 100㎞ 떨어진 적기를 격추할 수 있는 장거리 공대공미사일을 운용한다. 6.25 전쟁 당시 미그기와 F-86 사이에 벌어졌던 근접 공중전과는 차원이 다른 교전 능력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근접 공중전에 미군이 관심을 갖는 이유는 냉전 종식 이후 안보환경 변화에 따른 것이다.
냉전 시절에는 수십대의 전투기가 뒤얽혀 미사일을 쏘며 공중전을 벌이는 전면전 위험이 높았다. 1982년 시리아 베카 계곡에서 이스라엘과 시리아 공군 전투기 수십대가 치열한 공중전을 벌인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냉전이 종식되면서 하늘에서의 전면전 위협은 낮아지고 있다. 반면 여객기 공중납치, 미확인 항공기의 우발적 영공 접근 또는 침범, 항로를 이탈한 민간 항공기 유도 등 공중치안유지 관련 임무는 늘어나는 추세다.
이같은 임무는 레이더만으로 수행할 수 없다. 조종사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거나 전투기의 광학장비로 조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항공기에 매우 가까이 접근해야 한다. 육안이나 광학장비 관측이 가능할 정도로 근접하면 스텔스 성능도, 첨단 전자장비도 무용지물이다. 단거리 공대공미사일과 기관포로 교전해야 하는데, 이같은 근접 공중전은 조종사의 숙련도와 훈련 수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평소에 대비를 해야할 필요가 제기되는 대목이다.
스텔스 기술의 발달도 근접 공중전의 비중을 높인다. 중국과 러시아는 J-20과 SU-57 스텔스 전투기를 앞세워 미국의 제공권에 도전장을 내밀 태세다. 양측이 모두 스텔스 성능을 갖고 있다면, 먼 거리에서 상대방을 탐지하기가 어렵다. 결국 가까이 접근해 교전을 벌일 가능성이 높은데, 첨단 장비에만 의존해 미사일을 쏘고 후퇴하는 전투방식으로는 부족하다. 조종사의 능력으로 적기를 격추하는 근접 공중전 훈련이 필요한 대목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공군은 2023년까지 4차 산업혁명 신기술이 적용된 ‘지능형 스마트 비행단’을 구축할 예정이다.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 기반 항공기 과학화 정비훈련센터 구축, 사물인터넷 기반 조종사 헬스케어 등도 추진하게 된다.
4차 산업혁명 기술을 군에 적용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미식별 항공기에 대한 대처 능력 유지 및 발전이 더 시급한 게 현실이다. 중국 군용기는 독도, 울릉도, 강릉 앞바다까지 진출하고 있으며 러시아 군용기는 독도 영공을 침범해 우리 공군 전투기가 경고사격을 감행했다. 영공 수호를 위해 설정한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의 실효성이 이렇게까지 흔들린 적은 없었다.
한국방공식별구역과 영공을 지키려면 절제된 대응이 필요하다. 레이더에 중국, 러시아 군용기를 포착해 미사일을 쏘는 행위는 불가능하다. 육안 확인이 가능한 거리에서 대응할 수밖에 없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공중전의 기본인 근접 전투 기술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대목이다.
한국군이 첨단 장비에 의존한 공군력 건설과 전투능력 확보에 골몰하는 동안, 미군은 예전의 전투기술을 되돌아보는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기본기를 충실히 다지지 않은 진보는 모래성과 같다. 미군의 향후 움직임을 주시해야 할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