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는 25일 “북한이 해안포를 발사한 것은 9·19 군사합의 위반”이라며, 언제·어디로·몇 발을 쐈는지는 대북 정보 사안이라며 밝히지 않은 채 ‘유감’을 표명했다. 연평도 포격 도발 9주기 추모 행사와 부산 한·안세안 특별정상회의 개최 시점에 맞춰 북한이 고의로 9·19 남북 군사합의를 위배한 것이다. 군사합의는 서해 남측 덕적도에서 북측 초도 사이 135㎞ 구간을 완충수역으로 정했으며, 이곳에서 포사격 및 해상 기동훈련을 중지하고 해안포와 함포에 덮개를 설치하고 포문을 폐쇄하기로 했다. 우리 해군은 이 수역에서의 기동훈련을 일절 중단했고, 백령도의 해병대는 육지로 건너와 다른 부대 K-9 자주포로 포격훈련을 한다.
북한이 ‘고의적 합의 위반’을 저지른 배경을 점치긴 어렵지 않다. 한국이 북한의 심기를 살피면서 다수의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축소했지만, 북한은 사사건건 시비하면서 핵 개발과 미사일 발사를 계속했다. 미사일을 쏘아대면서 한국을 향해 “맞을 짓을 하지 말라”고 훈계하고, 미·북 실무대화를 앞두고는 “한국은 끼어들 생각 말라”고 핀잔을 줬다. 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 협력을 통한 평화경제’를 거론하자 “삶은 소대가리도 웃을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동안 북한은 “사대적 근성과 외세 의존을 버리고 제대로 민족 이익을 대변하라”고 한국을 닦달해 왔다. 유엔의 대북 제재를 무시하고 경협에 나서라는 얘기다. 북한의 대남 비방과 오만한 태도는 기본적으로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와 동맹을 버리고 자신들의 품으로 뛰어들라는 압박이다. 하지만 남북 간 수직적 서열화를 통해 남북관계를 확실히 지배하겠다는 의도도 무시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는 국제사회로부터 ‘평양정권의 대변인’이라는 비난까지 들으면서 ‘민족 공조’에 부응하려 했지만, 평양으로부터 계속 꾸지람을 듣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우선, 국방부가 ‘군사합의 위반’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북한에 유감을 표시한 것은 처음인데, 국민은 매우 혼란스럽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재개해 합의를 사문화(死文化)시킨 건 지난 5월이었고, 10월에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까지 쏘았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위반’이라 하지 못했고, 국방장관이 국회에서 속 시원한 답을 한 적도 없다. 대통령이 유엔 연설에서 “북한이 한 번도 위배한 적이 없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연평도 포격 도발 추모행사와 국제행사가 열리는 시점에 맞춰 군사합의를 위반하는데도 국방부는 ‘유감’ 표명을 했을 뿐이다. 앞으로도 국방부가 저자세를 계속한다면 과거의 남북 합의들이 그랬듯 9·19 군사합의도 ‘한국만 지키는 합의’가 되고 말 것이다. 예비역 장성들이 전현직 국방장관을 고발했을 만큼 처음부터 이적성 논란이 많았던 것이 이 군사합의다. ‘남침대로를 열어준 합의’로 비난받는 이 합의가 우리만 지키는 합의로 귀결된다면 한국의 안보 입지가 더욱 비참해짐은 불문가지다.
따지고 보면, 한국 정부가 북한의 오만방자를 자초한 측면이 작지 않다. 북한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정부와 군으로는 남북이 함께 지키는 합의를 만들기도 어렵고 남북관계의 안정적 관리나 진정한 의미의 남북 화해도 불가능하다. 해안포 발사가 남북 군사합의 위반이면 국군도 포격훈련, 기동훈련 등으로 대응하는 것이 기본이다. 우리만 지키는 합의라면 진작에 폐기했으면 좋았다. 멀리 보면 그것이 한반도 평화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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