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만물상 - NHK

바람아님 2014. 1. 28. 09:14

(출처-조선일보 2014.01.28 김태익 논설위원)


1942년 태평양 미드웨이 해전은 2차 대전이 터진 뒤 미군이 일본을 이긴 첫 전투였다. 일본은 주력 항공모함 네 척과 전투기 200여대를 잃는 참패를 했다.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 후 밀리기만 하던 미국이 전쟁 주도권을 잡는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일본 라디오 보도는 달랐다. "아군 항공모함 한 척 침몰, 한 척 파손." 전쟁을 지휘한 일본 대본영(大本營)이 "국민 사기를 고려하라"고 내린 지침에 방송이 알아서 긴 결과였다.

▶그보다 더한 방송 왜곡 사례는 1944년 타이완 근처 해역 전투 보도였다. 일본 라디오는 자기네 전투기가 미국 항공모함을 열한 척 격침시키고 여덟 척을 대파(大破)하는 전과(戰果)를 올렸다고 전했다. 그러나 실제로 가라앉거나 부서진 미군 항공모함은 한 척도 없었다. 오히려 일본군이 철저하게 무너진 전투였다. 43년 일본군이 남태평양 솔로몬제도 전투에서 패해 후퇴를 결정했을 때도 일본 라디오는 '전진'이라고 보도했다.

만물상 일러스트

▶일본의 방송은 1926년 정부가 주도해 만든 일본방송협회(NHK)에서 출발했다. 당시 일본 체신부 장관은 "방송 업무는 국무(國務)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일본이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치달을 때 일본 방송은 교묘한 거짓말과 선동으로 국민을 '성전(聖戰)'에 몰아넣었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전사자 초혼제가 열릴 때면 아나운서는 스스로 전사자 영혼이 된 듯 국민을 향해 젖은 목소리를 토해냈다. "어머니, 슬퍼하시면 안 돼요. 나는 호국 영령이 돼 영원히 나라를 위해 살아 있을 테니까요."

▶1945년 일본 패전 후 맥아더 점령군사령부는 NHK의 명칭과 조직을 그대로 유지시켰다. 2차 대전 전에 일본방송협회가 갖고 있던 자산 1억6300만엔도 새 NHK가 이어받게 했다. 그런 한편으로 맥아더는 NHK가 일본 사회에 민주주의와 사상의 자유를 퍼뜨리는 중심축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쏟았다. 그 후 오랫동안 NHK는 영국 BBC와 함께 세계의 대표적 공영방송으로 꼽혀 왔다.

▶NHK 새 회장 모미이 가쓰토가 "군 위안부가 어디 일본에만 있었느냐"는 망언을 뱉어냈다. 일본군위안부의 강제성과 잔혹성을 부인하는 억지요, 왜곡이다. 그는 위안부 문제가 1965년 한·일협정 때 보상으로 해결됐다는 거짓말도 했다. 한·일협정 때 위안부 문제는 의제에도 오르지 않았다. 아베 총리가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되돌리려는 것처럼 모미이 회장은 NHK를 군국주의 광기가 들끓던 시대의 선전 도구로 되돌리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