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새×들이 무슨 돈을 달라고 해. 당장 저리 가!"
북한 함경북도 나진에서 중국인 왕천한(가명·56) 씨를 안내하던 국가안전보위부 요원이 소리를 꽥 지르며 욕을 퍼부었다. 돈을 달라며 왕 씨를 졸졸 따라다니던 꽃제비들을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얼굴이 꾀죄죄하고 옷차림이 형편없는 데다 비쩍 마른 아이들은 움츠러들었다.
왕 씨는 함경북도 일대를 매달 드나든다. 중국 훈춘(琿春)의 한 식당에서 만난 그는 자신의 목격담을 전하며 연신 줄담배를 피워 댔다. "길거리의 북한 아이들이 무얼 먹는지 아세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가장 깊게 배어 있는, 남북한에서 가장 가까운 '제3국'이다. 북한 안에서는 처참하고, 그걸 피해 탈북한 중국에서도 비참하다.
탈북 여성들이 인신매매를 당한 뒤 중국 현지에서 낳은 아이들은 국적도, 정체성도 없이 방치된 채 자라고 있다.
북-중 접경지대에서 북녘 아이들을 돕는 활동가들은 "이대로 가면 이 아이들은 '통일코리아의 미래'가 아니라 '최대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며 입을 모았다.
○ 굶주리고, 배우지 못하는 통일코리아의 미래들
따라다니며 구걸하기 위해서다. 왕 씨가 종종 이 근처를 지나가면 아이들은 뛰어나와서 말한다. "나 배고파요.
한 끼도 못 먹었어요."
중국 돈 1위안(약 178원)을 주면 아이의 한 끼가 해결된다. 북한 식당에서 국수 한 그릇이나 밥 한 공기를 먹을 수 있다.
그런 식당에 외국인들은 절대 가지 않는다. 아무 반찬도 없이 덩그러니 밥과 국, 또는 국수만 나오기 때문이다.
왕 씨는 아이들이 손을 내밀어도 돈을 쥐여 주지 못한다. 돈이나 먹을 것을 주려고 할 때마다 보위부 요원이 "어이, 그러면 안 됩니다"라고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차마 돈을 달란 말은 못 하고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눈빛만 보낸다.
아이들은 왕 씨가 가는 식당에도 나타난다. 손님들이 남긴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다가 식당 주인의 호통을 듣곤 한다.
배고픔은 북한의 교육을 무너뜨렸다. 친척을 만나러 함경북도를 오가는 중국동포 김모 씨는 얼마 전 친척집에 가서 숙식을 하면서, 초등생 조카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학교는 가고 싶으면 가고, 안 가고 싶으면 안 가요. 배고플 때도 안 가고…."
교사도, 급우도, 부모도 아이의 출·결석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김 씨는 "그 동네에서 학교에 매일 가는 아이들은 밥깨나 먹는
애들뿐"이라고 말했다. 교사들도 먹고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북한에선 교사 월급이 물가에 비해 적어서 봉급만 갖고는 살 수가 없고, 부업을 해야 생활이 가능하다. 나진의 한 교사는 "차라리 바다에 나가 미역을 주워다 팔면 봉급이 더 많겠다"는 말까지 김 씨에게 했다.
북한의 학교에선 학습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학생들에게서 돈을 걷어 해결하고 있다.
황해도 은율군 출신으로 중국에서 살고 있는 탈북자 김모 씨(43·여)의 아들(13)도 그런 이유로 걸핏하면 학교에 결석했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콩, 쌀, 돈을 요구한다.
"옛날과 달라서 책이고 학용품이고 나라에서 무상으로 못 줘요. 돈으로 다 해야 됩니다. 교복도 돈 있어야 입고, 없으면 못 입습니다. 다 돈입니다."
학교는 돈이나 곡식을 가져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내쫓았다. 김 씨의 아들도 돈을 못 내서 여러 차례 학교에서 쫓겨났고, 그럴 때마다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 갖다 바칠 돈이나 곡식이 마련될 때까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옥수수 농사를 짓고 농장에서 돼지 닭을 키웠지만 늘 돈이 없었다. 밤마다 군인들이 와서 도둑질해 갔기 때문이다. 아들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동네에서 놀거나, 정 안 되면 빌어먹으러 다녔다. 김 씨는 "학교도 못 가니 그저 집에서 '머저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 관광 상품으로 전락한 '접경지대의 꽃제비'들
북한의 국경 경비가 강화되면서 중국으로 나오는 꽃제비가 최근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일부 아이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중국으로 나온다. 중국까지 오는 아이들은 북한 내부의 꽃제비들에 비해 비교적 배짱이 두둑하고 수완이 좋은 부류다. 머리도 잘 돌아가는 편이다. 먹을 것을 잘 구해 먹어서 얼굴이 통통한 경우도 있다.
중국에 나온 꽃제비들은 몸이 아프거나 잠자리를 마련해야 할 때 가장 힘들어진다. 이 지역에서 탈북자들을 돕고 있는 박모 씨(57)는 "자신들을 돌봐 줄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면 산속 골짜기처럼 외진 지역에 토굴을 만들어서 숨어 지낸다"고 전했다. 길거리에서 주워 온 비닐봉투 등으로 잠자리를 마련한다.
▼ "네 엄마 북한 거지라며?"… 주변 멸시에 상처 안고 자라 ▼
누군가가 이 아이들을 데려다가 먹이고 재워 주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야생마 같은 아이들을 집에 두면 적응도 못할 것 같고, 혹시 문제가 생길까 우려해서다. 오히려 이 아이들을 '비즈니스 도구'로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박 씨는 "어떤 중국인들은 꽃제비들이 토굴 속에 살도록 내버려 두면서 외국인 등 외부 관광객들을 데려가 구경시켜 주고 사례비를 받는다"고 말했다. 한 중국인 브로커는 "꽃제비들을 구경시켜 줄 때 먹을 것도 갖다 주기 때문에, 우리들이 좋은 일을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북녘 아이들을 마치 '이색 사파리 관광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셈이다.
탈북하는 부모와 함께 중국으로 나온 아이들도 있다. 접경지역에서 최근 탈북자들을 만난 활동가들은 북한 어린이의 취학률이 30% 정도에 불과하다고 추산했다. 탈북 아이들을 중국 모처에서 돌봐 온 한 활동가(62)는 "아이들이 10대 중반인데도 받침이 있는 글자를 제대로 읽지도 못한다"며 "북한 교육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 모국과 고향 없이 자라는 아이들
접경지역에서 고통받는 또 다른 아이들은 탈북 여성이 중국에서 낳은 자녀들이다. 많은 여성들이 탈북 과정에서 인신매매를 당해 팔려 가고, 그렇게 만난 중국인 남성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 투먼에서 차로 4시간가량 떨어진 한 지역에도 이런 여성이 10명 남짓 살고 있었다.
탈북 여성 최모 씨(45)는 1998년 탈북했을 때 인신매매를 당했다. 지금의 중국인 남편에게 팔려 와 은주(가명·15·여)와 은호(가명·13) 남매를 낳았다. 최 씨가 이 시골 마을에 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북한 여자가 시집을 온다'며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몰려왔다고 한다. 최 씨를 둘러싸고 동물원 원숭이 보듯 신기해 했다. 그들이 쑥덕대는 중국어를 최 씨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얼마 후 중국 공안(경찰)이 찾아왔다. 잡혀가서 북송되지 않도록 뒤를 봐 줄 테니, 1년에 500위안(약 9만 원)씩 내라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잡아가겠다고 했다. 공안은 매년 설날을 며칠 앞두고 찾아왔다. 다음 해엔 1000위안을, 몇 년 뒤엔 2000위안을 요구했다. 15년이 더 지난 지금도 돈을 낸다. 최 씨는 "돈을 줄 테니 받았다는 증서라도 달라"고 요구했지만 공안은 주지 않았다고 한다. 검은 뒷돈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최 씨는 남편에게 "그냥 돈을 안 주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우리가 저 사람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그냥 내라면 내야 된다. 돈 안 내서 잡혀간 북한 사람들이 동네에서 얼마나 많은 줄 아나"라며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이웃의 다른 탈북 여성은 돈을 안 내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공안들은 그녀가 만삭의 임신부였을 때 잡으러 와서 북한으로 넘겼다. 그후 마을사람 누구도 그녀의 생사를 모른다.
뒷돈을 줘도 단속은 나온다. 중국 공안들은 비정기적으로 탈북자들을 색출하는데 탈북 여성이 사는 집을 모두 알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 단 돈을 꾸준히 상납한 가정에는 전화로 단속 사실을 미리 귀띔해 줘서 몸을 피하게 한다.
큰딸 은주가 태어났을 때는 또 다른 돈이 필요했다. 공안은 최 씨에게 "법에 걸리는 결혼"이라며 위협했고, 출생 등록을 하고 싶으면 뒷돈 1000위안을 내라고 했다. 최 씨는 사정한 끝에 700위안만 냈다. 둘째 은호가 태어났을 때는 남자라고 2000위안을 요구했다. 또다시 애걸복걸해 1500위안을 냈고 별도의 200위안으로 공안들에게 식사를 접대했다.
공안의 횡포보다 최 씨를 더 힘들게 하는 건 아이들의 심리적인 고통이다. 엄마가 호적도 없이 팔려 온 사람이라는 '주홍글씨'를 평생 안고 살아간다. 학교에서는 종종 "너희 엄마는 북조선 거지"라는 놀림을 받는다. 종종 중국인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하는 말조차도 상처만 된다. "네 엄마 북조선 사람이니까 잘 봐 놔라. 도망갈지 모르니까 주시해야 된다."
이런 까닭에 아이들은 엄마가 북한 사람이라는 걸 되도록 숨기려 하고, 창피해 한다. 은주도 "학교 친구들이 엄마가 북한 사람이란 걸 아는 게 싫다"며 울면서 투정했다.
이때 최 씨는 "그래. 엄마는 북조선 사람인데, 그러면 엄마 다른 데로 갈까?"라고 말했다. 은주는 "엄마가 싫은 게 아니고 학교에서 그런 얘길 하는 게 싫다"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최 씨는 자신들의 자녀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이 마을에서 살다가 아이들을 놔두고 도망간 탈북 여성들 꽤 있기 때문이다. 동네의 한 9세 남아도 그렇게 엄마를 잃었다.
"걔는 엄마 있을 때까진 공부 잘했어요. 근데 엄마가 도망간 뒤부터 학교도 안 다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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