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북한의 3차 북핵실험은 지난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후 본격적으로 추진한 핵무기 개발이 마무리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다.
양낙규 기자의 Defense Club 바로가기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20여년간 이어진 강온국면에서도 북한이 지속적으로 핵무기 보유 의지를 거두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 만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북정책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북한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와 어떤 상황에서도 핵무장 욕심을 꺾지 않을 것이란 것이 대북전문가들의 평가다.
핵개발과 병행해 이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로켓기술도 꾸준히 연구, 한반도 주변은 물론 미국에게도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위협을 통해 협상과정에서 더 많은 걸 얻어내려는 의도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6자회담 대표와 국가정보원 1차장을 지낸 이수혁 씨는 2011년 '북한은 현실이다'라는 책에서 "돌이켜보니 북한은 애초부터 핵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며 북한이 향후에도 핵 보유로 갈 것으로 내다봤다. 그의 분석이 이번 3차 핵실험으로 확인된 셈이다.
북한은 6ㆍ25전쟁 직후 핵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됐다. 1953년 정전협정으로 '무력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한 북한 김일성 주석은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핵개발에 관심을 두고 전문인력 양성을 시작했다. 1955년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에 핵물리강좌를 개설했고 다음해 과학원에 핵물리실험실을 신설했으며 1965년 소련의 협조로 영변에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했다.
북한은 1980년대까지는 원자력 기초교육과 연구에 초점을 맞추며 박천과 평산, 선천 등에 우라늄광산과 가공시설을 마련하는 등 기본시설 구축에 주력했다. 핵개발에 대한 북한의 이러한 남다른 애착은 매장량이 2600만t, 가채량은 약 400만t으로 추산될 정도로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는 우라늄에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보다 많은 우라늄을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인 셈이다.
그러나 북한은 원자력발전소 등 핵의 평화적 이용보다는 핵무기에 관심을 두면서 국제사회의 골칫거리가 됐다.
북한은 1986년 1월부터 5MW급 원자로를 흑연감속로 방식으로 가동했지만,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1989년께 원자로 가동을 중단했다. 원자로 가동 중단에 이어 북한은 1992년에는 한국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으나 이듬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영변 특별사찰 요구에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맞섰다.
1993년 6월 북미 공동성명을 통해 NPT 탈퇴를 유보했던 북한은 1994년 이뤄진 북미 제네바합의로 주요 핵시설을 동결했다. 당시 제네바 합의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는 대신 미국이 북한에 2천MWe 경수로 원자로를 건설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2002년 10월 고농축우라늄(HEU) 개발의혹이 불거지고 미국의 압박이 가중되자 2003년 1월 끝내 NPT에서 탈퇴하고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했고 북미 제네바 합의는 휴짓조각이 되고 말았다.
이후 북한은 2005년 2월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선언했고 그해 5월에는 영변의 5MW급 원자로에서 폐연료봉 8000개를 인출하는 작업이 완료됐다고 발표했다. 이만한 양의 폐연료봉을 재처리할 경우 무기급 플루토늄 24∼32㎏을 추출해 3∼5개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 다음해인 2006년 10월9일 북한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지하에서 처음으로 플루토늄 방식의 핵무기를 실험했으며 2009년 5월25일에는 같은 방식으로 제2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1차 핵실험의 폭발력은 1킬로톤(ktㆍTNT 폭약 1000t의 폭발력)이었고 2차 핵실험은 2∼6kt가량으로 추정됐다.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폭발력은 1킬로톤(㏏)이었다. 2009년 2차 핵실험은 2∼6kt 가량으로 추정됐다. 2차 핵실험 당시 인공지진의 강도가 리히터 규모 4.4에 달해 10kt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1kt은 TNT 폭약 1000t의 폭발력과 맞먹는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위력이 15kt 가량 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폭발력이다. 북한은 내폭형 장치를 집중적으로 개발해 1980년대 후반부터 100여 차례 이상의 고폭실험을 했고 실제 핵실험을 통해 위력을 높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북한은 제네바합의로 주요 핵시설이 동결돼 플루토늄 생산이 어려워지자 그때부터 우라늄탄 개발에 박차를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라늄탄 개발에는 파키스탄의 가우리 미사일 개발에 북한이 결정적인 도움을 준 대가로 그 나라로부터 핵심기술을 이전받았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제기됐다. 이러한 50여 년에 걸친 북한의 핵개발 노력은 지난해 제3차 핵실험으로 이어지면서 다시 한번 한반도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며 국제사회에 난제를 던졌다.
통일연구원 전현준 북한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은 "대량살상무기를 갖춰 체제 및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책"이라며 "김정일의 유훈관철, 군사적 우위 과시, 대미협상수단 등 외부적으로 무력공격을 막겠다는 의도와 함께 내부적으로는 주민통합을 위한다는 복합적인 의도"라고 설명했다.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時事論壇 > 國際·東北亞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핵 3차실험 1년후]④진전없는 6자회담 (0) | 2014.02.14 |
---|---|
北 "훈련기간 상봉 못해"…남북, 오늘 접촉 재개 (0) | 2014.02.14 |
[기고] 한반도 통일시대를 준비한다,전봉근 국립외교원 안보통일연구부장 (0) | 2014.02.13 |
[북핵 3차실험 1년후]②4차 핵실험은 언제? (0) | 2014.02.11 |
[뉴시스아이즈]이슈진단 '북한에 급변사태 온다면…'-어느날 갑자기 찾아올 '통일 대박' 준비해야 (0) | 2014.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