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行·탐방·名畵/기행·여행.축제

돌담길엔 그가 있다, 그의 그림엔 돌담길이 있다

바람아님 2014. 3. 10. 17:06
서울의 명소, 덕수궁 돌담길은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돌담길 풍경을 더 아름답게, 정겹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100여점의 유화들이다. 지하철 시청역에서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향하는 돌담길 양쪽에는 사계절, 늘 크고 작은 다양한 그림들이 놓여 있다. 벌써 5년째다. 팍팍하고 바쁜 일상생활 속에서 문득 추억에 젖게 하고,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림들. 도대체 누구의 작품일까. 돌담길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야외 미술관으로 만드는 화가는 어떤 사람일까.



조용준 화백이 나무벤치에 앉아 덕수궁 돌담길의 가을풍경을 화폭에 담고 있다. 그에게 이 공간은 작업실이자 전시장이다.



주인공은 바로 옆에 있다. 돌담길 한 나무벤치에 늘 이젤을 마주하고 앉은 조용준 할아버지(80·사진). 스스로를 "그림쟁이"라 부르는 화업 60여년의 노 화백이다. 조 화백은 5년째 덕수궁 돌담길로 출근하고 있다. 경기 양주의 집을 나서 전철을 타고 오전 9시쯤이면 돌담길에 자리 잡는다. 그가 첫 번째로 하는 일은 그림들을 시민들이 잘 볼 수 있게 거리 양쪽에 펼쳐놓는 것. 그러곤 늘 그렇듯 벤치에 앉아 이젤을 세우고, 캔버스를 올린 뒤 물감을 꺼낸다. 이어 나이프를 잡고 쓱쓱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밑그림은 없다. 작품 구상은 출근길 전철에서 이뤄진다. 작품 형식은 초상화, 정물화, 구상·추상화를 넘나든다. 시민들의 관심을 잡기 위해 유명 작가의 작품도 모작한다. 그림은 얼마나 팔릴까, 외람되게도 물었다. 하루 평균 한 점 이상은 나간다고 한다. 점심은 아내가 싸준 도시락으로 해결하고 길을 가던 사람들과 말을 나누기도 한다. 그렇게 오후 5시가 되면 그는 그림들을 거두어 쌓아놓고, 집으로 돌아간다.



조용준 화백이 나이프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는 밑그림을 생략하고 나이프에 유화물감을 발라 그림을 그려낸다.

조 화백은 어린 시절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었으나 정규 미술교육은 받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미군부대 앞에 나갔고, 거기서 초상화를 그렸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자식들은 모두 잘 컸고, 그림을 접은 뒤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슴 한 귀퉁이에 늘 아쉬움이 남았다.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보자는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래서 찾은 곳이 스스로 "놀이터"라 부르는 덕수궁 돌담길이다. 조 화백에게 덕수궁 돌담길은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우는 작업실이지만, 덕분에 시민들은 세상에서 가장 넓은 미술관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