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行·탐방·名畵/기행·여행.축제

미국 LA, 때아닌 '십자가 논쟁'..끊임없는 '정교분리' 논란

바람아님 2014. 3. 27. 09:26
    미국 LA에서 십자가 표시를 놓고 위헌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기독교 국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미국 헌법은 엄격하게 정치와 종교의 분리 원칙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원래 청교도 이주민들이 세운 나라이기는 하지만 정치와 종교가 결합했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잘 아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헌법을 만들면서 정교 분리를 선언했습니다. 조문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의회는 종교를 만들거나 혹은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는 어떤 법률도 만들 수 없다" (Congress shall make no law respecting an establishment of religion, or prohibiting the free exercise thereof.)

국가 권력이 종교 활동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건 매우 간단하고 논란의 여지도 적습니다. 그런데 그 앞의 종교를 만드는 법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는 부분은 이후로도 많은 논란을 낳았습니다. 이를 이른바 '종교 설립 조항' (establishment clause)라고 부르는데 국가 권력과 종교의 분리와 관련한 논란의 대부분은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정부가 특정 종교를 창설하거나 후원하는 것을 막는 것인데 신심이 두터운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종교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을 추진했기 때문이죠.

LA에서 문제가 된 건 카운티의 문장(Seal)입니다. 문장은 카운티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비롯해서 모든 공문서와 집기, 제복, 공무용 자동차, 공공건물 등에 부착이 됩니다. 카운티는 미국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자치 행정 단위입니다. 우리는 보통 '군'이라고 옮기는데 우리 군과는 많이 다릅니다. 미국의 행정은 거의 대부분 카운티를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카운티마다 경찰, 검찰, 법원 등이 독립적으로 설치돼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시와 군에 동시에 소속되는 경우가 없지만 미국은 어떤 지역이든 특정 카운티에 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시라도 특정 카운티에 속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지도의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이 LA카운티입니다)

LA라는 대도시도 LA카운티에 속해 있습니다. LA시를 포함해서 인구 1천만 명이 넘는 지역을 포괄합니다. LA카운티는 주민들의 직선으로 뽑힌 행정관(Supervisor) 5명이 위원회(Board of Supervisors)를 구성해서 각각 분야를 담당해서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중요한 사안은 5명이 표결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LA 카운티는 그동안 문장을 두고 논란을 계속해 왔습니다.

원래 LA카운티가 1957년에 처음 만든 문장의 오른쪽 중간에는 십자가 표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교 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일자 지난 2004년 십자가 표시를 지웠습니다. 당시 행정위원회의 표결에서도 3대 2로 의견이 갈려 가까스로 십자가 제거를 결정했습니다. 이후에도 소송이 계속됐지만 2007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십자가를 제거한 카운티 결정에 대한 소송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논란이 일단락됐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우리와 달리 연방대법원이 제기된 모든 사건을 심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사건들만을 '골라서' 심리하는데 이 관문을 넘지 못한 겁니다. (사진을 보면 십자가 표시가 있는 왼쪽이 처음 만들어진 문장이고, 오른쪽이 2004년에 만들어진 겁니다)

2004년에 새로 문장을 만들면서 십자가를 지우고 대신 그 자리에 LA 지역에 처음 정착한 스페인 이주민 공동체인 '샌개브리엘 미션(San Gabriel Mission)' 그림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지진으로 무너지고 없던 이 미션 지붕의 십자가가 최근 미션을 재건하면서 되살아났습니다. 문장에 있는 미션의 그림과 실제 미션의 모습이 달라지게 된 겁니다. 그러자 최근 일부 행정책임자들이 실제 미션의 형상과 문장이 다르다며 십자가를 복원하자고 주장해 관철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결정도 역시 3대 2의 표결로 나왔습니다. 아직 LA 카운티 공식 홈페이지 등에는 여전히 십자가가 제거된 기존 문장이 걸려 있습니다. 결정이 됐으니 곧 십자가가 만들어질 겁니다.

문장에 십자가를 복원한다는 LA카운티의 결정이 나오자 곧바로 미국 시민자유연맹(ACLU)가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ACLU는 지난 2004년의 십자가 삭제를 주도했던 단체입니다. 십자가를 공공기관의 문장에 표시하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특혜이며 카운티 주민을 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로 분리하는 부적절한 처사"라는 겁니다. 곧바로 연방법원에 위헌 소송을 냈습니다.

미국 수정헌법 1조의 정교분리 원칙은 문구 자체만으로는 의회의 관련 법률 제정을 금지하는 것이지만 공권력을 통해 종교적 활동을 지원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지방자치단체도 포함됩니다. 지금까지 논란이 된 사례들을 살펴보면 조금 헷갈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종교단체가 만든 학교에 세금을 지원하는 것은 위헌이지만 어느 학교에나 다 지원하는 수준의 교재나 일반 과목 교사의 급여를 지원하는 것은 합헌이었습니다. 또 연말에 시청이나 광장 등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드는 것은 통상 합헌으로 인정됐지만 여기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십자가 상을 설치하는 것은 위헌으로 판단됐습니다. 주 의회가 개회식을 할 때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은 합헌으로 인정됐죠.

이렇게 좀 애매한 측면이 있다 보니 이번에도 시민단체들의 반발이 있을 것을 예상하면서도 십자가를 카운티 문장에 넣기로 한 걸로 보입니다. '샌가브리엘 미션'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십자가를 넣는 것이니 이른바 위헌 판단을 피해갈 수도 있을 거라는 판단을 했을 법도 합니다.

미국 사회에서 이른바 보수 진영은 끊임없이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에 벌인 테러와의 전쟁은 그래서 이슬람 대 기독교라는 종교 전쟁의 양상을 띠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사실관계까지 왜곡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미국을 만들 때부터 '기독교 국가'를 상정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요. 명백하게 수정헌법 1조의 정신에 어긋나는 말입니다. 이미 위헌 논란으로 삭제했던 십자가를 되살리려는 시도가 나온 것도 이런 사회적 흐름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당히 보수 성향이 강해진 미국 연방대법원이 앞으로 이 사건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지 궁금합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고심해서 만들어 놓은 기본 원칙을 지키려는 태도 또한 보수주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