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2.10.03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문화는 원래 사고파는 상품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품 속에 문화가 녹아있고 또 문화 자체가
상품화되어 전 세계 사람의 삶을 알게 모르게 변화시킨다.
아시아 사회에서 줄 서기 문화는 분명 서구에서 수입된 것이다.
사실 유럽인들이라고 언제나 줄을 잘 섰던 것은 아니다.
1850년대에 독일인 여행자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이 줄을 제대로 안 선다고 개탄했다.
1950년대에는 반대로 영국인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독일인들이 줄을 제대로 안 서는 것을 보고 놀랐다.
21세기가 되자 영국에서 다시 줄 서기 문화가 갈수록 흐려지고 있다고 한다.
'본토'에서 줄 서기 문화가 쇠락하는 동안 그것이 아시아로 수출되었다.
중국에서 줄을 제일 반듯하게 잘 서고, 화장실을 깨끗하게 사용하는 곳은 햄버거 가게라는 말이 있다.
작은 예이지만 서구식 가게가 외래문화가 흘러들어오는 창구 역할을 하는 것이다.
브라질의 인구 동향을 연구하는 학자는 20세기 후반에 이 나라의 인구증가율 하락의 중요한 원인이 1970년대에 들어온
미국 연속극이라고 분석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미국 연속극은 중간 계급이나 상층 계급의 도시적 가치를 매우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어 전국에 내보냈다. 시청자들은 이제 그들의 전통문화와는 다른 행동 패턴과 다른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
가족 계획 프로그램보다 이런 드라마가 훨씬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서구 영상물의 '파괴적' 효과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은 중동 이슬람 국가들이다.
특히 화면에 보이는 서구 여성들의 의상, 행동 방식,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이 여성 시청자들에게 선망을 불러일으키고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종교인이나 보수적 지도자들이 볼 때 할리우드 영화는 낯선 가치를 숨기고 있는
트로이의 목마나 다름없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입장에서는 서구의 문화적 '공격'이 무슬림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그 대신
세속적이고 심지어 기독교적 정체성을 심으려 하는 것으로 비쳤다.
사실 경제적 경쟁 관계로 보면 서구보다는 동아시아가 이슬람권에 더 위협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서구만큼 공분을 불러일으키지 않은 이유는 지금까지 상품만 수출했지 문화를 수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늘 외래문화 유입의 충격에 대해 우려해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 문화가 세계로 흘러나가고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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