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청나라 모래바람도 조선의 젊은 열정은 꺾지 못했다

바람아님 2024. 4. 7. 06:19

조선일보 2024. 4. 6. 03:01

[아무튼, 주말]
[손관승의 영감의 길]
발로 쓴 해외 견문록
이기지의 ‘일암연기’

꽃 소식과 함께 황사도 찾아왔다. 300년 전의 여행자 이기지(1690~1722)의 자취를 따라가던 날도 모래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그의 청나라 여행기 ‘일암연기(一菴燕記)’는 조선 사신단이 황사로 고생하는 장면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동악묘 앞에 도착하자 뒤쪽에서 세찬 바람이 일었는데, 먼지와 모래가 하늘을 뒤덮어 지척에 있는 사람과 말조차 분간할 수 없었으며” 숙소로 돌아와 “급히 양치하고 세수하였으나 치아 사이에서 여전히 모래 가루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고 기록한다. 이전 사신단은 황사로 호마(胡馬)를 잃어버렸을 정도로 북방의 모래바람은 골칫거리였다.

1720년, 숙종의 사망과 경종의 왕위 계승을 승인받기 위한 사신단이 꾸려졌을 때 부친 이이명이 책임자로 임명되자 그는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동행하게 된다. 조선에서 해외로 나갈 기회란 사신단이 전부였으며, 정사와 부사 그리고 서장관에게는 집안사람을 데리고 중국 견문 기회를 주었으니 곧 자제군관 제도였다. 비공식 수행원이었기에 비용은 스스로 부담하는 대신 공식 일정에서는 벗어났다. 

조선 사신 숙소는 전통적으로 옥하관이었지만 ‘대비달자(大鼻㺚子)’, 코 큰 야만인(러시아)에게 밀려 법화사로 바뀌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조선은 인조가 청나라에 치욕당한 이후 청일전쟁 때까지 258년간 494회에 걸쳐 사절단을 파견하는데 명나라 때까지 합하면 이보다 훨씬 많다.

당시 북경에 세 성당이 있었는데 마테오 리치가 세운 중국 최초 성당이자 소현세자와 인연이 있는 남당(南堂)을 자주 찾았다. 서양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데다 선교사는 과학자이며 엔지니어,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이기지는 세종의 아들 밀성군의 후예로서 수학과 이공학에도 두루 밝은 융합 지식인이었다.

이기지는 귀국 직후 안타깝게도 신임사화로 부친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그의 기록은 후세에 전해졌다. 젊은 여행자가 대륙에서 맛본 자유의 달콤함과 이국적 체험은 18세기 후반 조선 사회에 그랜드투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https://v.daum.net/v/20240406030114975
청나라 모래바람도 조선의 젊은 열정은 꺾지 못했다

 

청나라 모래바람도 조선의 젊은 열정은 꺾지 못했다

꽃 소식과 함께 황사도 찾아왔다. 300년 전의 여행자 이기지(1690~1722)의 자취를 따라가던 날도 모래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그의 청나라 여행기 ‘일암연기(一菴燕記)’는 조선 사신단이 황사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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