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4. 5. 30. 00:07
초상화도 상상과 해석의 영역
품위 지켜도 비판적일 수 있어
정치적 평가·논란까지 담아서
지도자의 성찰 계기 삼았으면
반쯤 완성된 자신의 새 초상화를 처음 봤을 때, 화가에 따르면 영국 찰스 3세는 “강렬한 컬러에 살짝 놀랐다”고 한다. 만족스러운 미소도 보였다지만 즉위 이후 처음으로 그린 공식 초상화가 온통 타오르는 붉은색으로 넘실댔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달 중순 공개된 그림은 실제로 강렬하다. 국왕의 제복도 바탕도 붉은색이어서 선홍빛 바다에 얼굴만 떠 있는 듯 보인다. 어깨의 나비는 왕자에서 군주로 거듭나는 탈바꿈의 과정, 자연에 대한 그의 애호를 중의적으로 상징한다. 이제 국왕은 환경과 관련된 행보에 나설 때마다 작은 나비를 떠올릴 것이다.
국왕의 초상화엔 권위와 위엄만이 넘칠 줄 알았는데 BBC는 그것이 ‘옛날 초상화’의 특징이라고 했다. 현대의 초상화라면 현대 미술이 대개 그렇듯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쪽이 자연스럽다. 영국 왕족의 초상화 중엔 옛날 같으면 불경죄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들도 있다. 1998년 완성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상화는 샛노란 바탕색이 목을 가로질러서 머리와 상체가 분리된 듯 보인다. 당시 27세였던 작가는 “오늘날의 군주제에 필요한 펑키함을 묘사했다”고 했지만 “여왕을 참수했다”는 비판도 거셌다. 여왕의 남편 필립 공은 2003년 공개된 초상화에서 상의를 벗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됐다.
영국이 유별난 걸까. 2018년 공개된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초상화는 꽃과 나뭇잎이 배경에 가득하다. 아프리카 백합, 재스민, 국화는 각각 케냐(혈통), 하와이(출생지), 시카고(정치 기반)를 의미한다. 개인이 걸어온 길이자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역사의 행로다.
우리 대통령들의 초상화는 어떤가 싶어서 검색해 보니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기사가 나왔다. 문재인 정부 시절 박물관에서 ‘역대 대통령’ 코너에 박근혜 전 대통령 초상화를 걸지 않다가 아예 코너를 없애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림은 화제가 되지 않는다. 그림을 도구화하는 편협이 논란이 될 뿐이다.
우리도 더 자유롭게 그리고 더 널리 전시하면 어떨까.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인 지도자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작은 계기는 되지 않을까.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https://v.daum.net/v/20240530000727289
[에스프레소] 대통령 초상화는 어진(御眞)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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