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4.06.10 김태익 논설위원)
1949년 경복궁에서 열린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공문서가 한 장 날아들었다.
입선작인 김흥수의 '나부 군상(裸婦 群像)'을 떼내라는 문교부 지시였다.
안호상 문교부 장관은 "한 사람은 모르겠는데 여러 사람 나체를 한 화면에 그린 것은 부도덕하다"고 했다.
언론에서 '도덕이냐 예술이냐' 논란이 일었다. 김흥수는 "한 모델의 나체를 여러 각도에서 그렸을 뿐"이라고 맞받았다.
그림은 결국 떼어졌다. 국전 사상 전시 도중 작품이 철거된 첫 사례였다.
▶김흥수에게는 '고집쟁이' '이단아' 같은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만큼 예술적 소신이 뚜렷해 화단 유행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가 4년 만에 다시 국전에 내놓은 그림은 국전 사상 최초의 추상 작품이었다.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손해를 무릅쓰면서도 마다하지 않았다. 1988년 거래하던 표구점에 불이 났다.
그가 맡긴 대작(大作) 16점도 재가 됐다. 해외 전시를 앞두고 몇 년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이었다. 당시 작품가로도 8억원에 달했다.
▶며칠 후 표구점 주인이 집문서를 들고 찾아와 "이걸 팔아서라도 보상을 하겠다"고 했다.
김흥수가 말했다. "천만금을 받은들 타버린 작품이 돌아오겠소?
뜻하지 않은 일로 모든 걸 잃은 문화 사업자를 두 번 죽이고 싶지 않소."
2007년 조선일보가 '거실을 서재로' 캠페인을 벌일 때 그가 지팡이를 짚고 편집국에 왔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수표 한 장을 꺼내며 이렇게 말했다.
"형편이 어려워 책상도 없이 거실 바닥에 엎드려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책상이나 사주시오." 수표는 5000만원짜리였다.
▶김흥수는 일흔 넘어서까지 웬만한 사람과 팔씨름을 하면 지지 않는다고 했다.
만년에도 집 안에 아령 역기를 두고 운동했다. 이런 에너지에서 그의 대표작 '하모니즘' 시리즈가 나왔다.
그는 교수 정년 나이에 마흔세 살 어린 제자와 사귀다 1992년 결혼했다.
두 사람에게 "제자 장래 망치고 있다" "유명 화가 덕 보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우리의 결혼을 혼탁한 눈길로 보지 말라. 진실된 사랑만이 이룰 수 있는 기적을 우리는 이룬 것"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어제 갔다. 젊은 아내를 암으로 먼저 떠나보낸 지 2년 만이다.
그는 집 한 채와 자기 작품들 말고는 가진 게 없었다. 그나마 작품 가운데 20점은 제주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는 아흔 넘도록 증손·현손뻘 되는 어린이들을 모아 그림 가르치는 걸 즐거워했다.
그렇게 배운 미술 영재가 수천 명 된다. 사람은 가도 예술가의 혼(魂)은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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