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4.06.27 박정훈 디지털 담당 부국장)
日 정부, 8·15 敗戰 때 며칠간 '戰犯 면책' 노려 관련 서류 폐기
위안부 연행·사기·협박 史實도 '공권력 동원 물증 없다'고 强辯
생체 실험 731부대 기록도 없애 良心마저 불사르고 핑계 대나
존 다우어 MIT 명예교수의 '패배를 껴안고'는 2차 대전 직후 일본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파헤친 걸작이다. 퓰리처상에 빛나는 이 책은 1945년 8월 15일 패전일(敗戰日)의 풍경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일본 전역에서 미친 듯이 서류를 폐기하는 군 장교와 관료가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미군 공습이 끝난 뒤에도 도쿄의 하늘은 여전히 연기로 시커멓다는 농담이 나돌 정도였다.
미군 소이탄이 내뿜던 지옥의 불길 대신에 서류 더미의 모닥불이 곳곳에서 타올랐다.'
미군이 도쿄에 도착한 것은 히로히토 일왕(日王)이 항복 선언을 하고서도 열흘이나 지나서였다.
일본으로선 전쟁범죄와 관련된 문서를 폐기하는 데 충분한 시간 여유가 있었다.
연기가 되어 사라진 문서 목록에 어떤 게 있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아마 불리한 기록은 모조리 없앴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왕 이하 군부·관계·재계에 포진해 있던 수많은 전범(戰犯)은 책임을 은폐할 수 있었다.
위안부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일본 정부가 들이미는 논리가 '물증(物證) 없음'이다.
위안부가 강제 동원됐음을 증명하는 공(公)문서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주 아베 정부가 발표한 고노(河野) 담화 검증 보고서의 결론도 그랬다.
보고서는 일본 정부의 각 부처가 보유한 문서를 조사한 결과 '강제 연행'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썼다.
명시하진 않았지만 조선인 위안부가 돈을 벌 목적의 '매춘부'였다는 뉘앙스였다.
물론 일본의 주장은 역사적 진실과 다르다. 총칼로 위협해 납치·연행하는 것만 강제 모집이 아니다.
대부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좋은 데 취직시켜 주겠다는 사기(詐欺)에 속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혹은 "정신대(挺身隊)에 안 가면 부모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압박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자기 의사에 반해 성 노예로 끌려갔음을 일관되게 밝히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서류는 하나 둘이 아니다.
일본 학자 요시미 요시아키가 찾아낸 '육군성 통첩(1938년)'엔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운영에 개입했음이 명시돼 있다.
나가이 가즈가 발굴한 '야전주보규정(野戰酒保規程·1937년)'은 위안소를 아예 군 병참 시설의 일부로 설치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군부가 세상을 지배하던 군국주의 시절이었다.
서슬 퍼런 육군이 나섰다는 것 자체가 공권력의 강제력이 뒷받침됐음을 방증하고도 남는다.
실제로 일본 법원도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낸 세 건의 소송에서 일본 재판부가 모두 '본인 의사에 반해 위안부가 됐음'을 받아들였다.
다만 시효가 지났다는 등의 이유로 배상 청구만 기각됐을 뿐이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길거리에서 부녀자를 끌고 간 '강제 연행' 문서가 없다는 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런 공문서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일제(日帝) 암흑기에도 법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형법엔 '해외 이송의 목적으로 약취(略取)·유괴하면 2년 이상 징역에 처한다'(226조)는 조항이 있었다.
위안부 강제 모집은 여기에 걸리는 범법(犯法) 행위였다.
아무리 무자비한 일제지만 엄연한 범죄 행위를 공문서에 써서 지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설사 그런 기록이 있었더라도 패전 직후 다 폐기됐을 가능성이 높다.
공문서가 대량 소각된 사실은 일본 측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1965년 발간된 '대동아전쟁 전사(全史)'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각료회의 결정이 이뤄졌을 때 육군 중앙 시설이 들어선 도쿄 이치가야에선 기밀 서류의 소각이 시작됐다. 모든 육군 부대에 대해 서류 소각 통첩이 내려졌다. 서류를 태우는 검은 연기가 8월 14일 오후부터 16일까지 계속됐다.'
패전 당시 내무성 문서 담당 사무관이었던 오야마 다다시는 이렇게 회상하기도 했다.
'내무성 문서를 전부 소각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나중에 어떤 사람에게 어떤 피해가 갈지 모르기 때문에 선별하지 말고 전부
태우라는 명령이었다. 내무성 뒤뜰에서 사흘 밤낮으로 활활 밤하늘을 그을리며 태웠다.'(속내무성외사·續內務省外史·1987년)
그 결과 수많은 전쟁범죄와 인권유린 사실이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중국 측 발굴로 세상에 알려진 '731부대'의 악명 높은 생체 실험도 일본 공문서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위안부 강제 동원 기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기들이 다 폐기했으면서도 문서 타령하다니, 일본 정부에 양심이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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