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4.07.04 강천석 논설고문)
동북아 3국 지도자 사이 非對稱 대화는 非正常
동맹 내용과 質 변하는 전환기 中心 잡아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3일 서풍(西風)을 타고 서울에 왔다.
중국 최고 지도자가 취임 후 평양보다 서울을 먼저 찾은 건 처음이다.
시 주석이 여러 나라를 묶어 순방(巡訪)하지 않고 한 나라를 골라 단독 방문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공산당 일당(一黨) 국가 중국 최고 권력자 모습을 대학의 공개 강연 자리에서 마주치는 날이 오리라곤
짐작도 못 했다.
시 주석이 서울공항에 발을 딛기 몇 시간 전 아베 일본 총리는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일부 해제하겠다고 발표했다. 2006년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계기로 대북(對北) 제재를 시작한 지 8년 만이다.
북한이 내놓은 일본인 납치 피해자 특별조사위원회 구성을 보니 문제 해결의 성의가 느껴진다고 했다.
아베 총리 연내 방북설과 다음 달 북·일 외무장관 회담 추진설도 날아들었다.
오전엔 동풍(東風)에 실려온 일본 바람이, 오후엔 중국 바람이 평양과 서울 거리를 번갈아 쓸고 간 하루였다.
역시 중국이고 일본이다. 우리 부엌의 숟가락 숫자만이 아니라 몸의 땀구멍 숫자까지 세보는 모양이다.
시 주석은 역사의 급소(急所)를 눌렀다. 그는 서울대 강연에서 "20세기 전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야만적 침탈과 영토 강탈로
한국과 중국 모두 큰 고난을 겪었다"면서 "그때 양국 국민은 생사를 같이하고 서로 도왔다"고 했다. 시 주석은 임진왜란까지
수백년을 거슬러 올라갔다. "역사상 위태로운 상황이 발생했을 때마다 한·중 양국은 서로 도우며 (위기를) 극복했다"고 했다.
현재의 상황과 현재의 필요를 반영하며 끊임없이 다시 쓰는 게 역사다.
일본에 아베 정권이 출범한 이후 역사 왜곡 문제가 시도 때도 없이 도지는 게 동북아 상황이다.
중국의 최대 안보 관심사는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이 적극 호응하며 짜나가는 중국 저지선(沮止線) 형성에서 한국이 무슨 역할을
맡느냐다.
시 주석의 한·중 관계사(關係史) 강의는 이런 동북아 상황과 한·미·일 사이의 가장 약한 고리를 더듬어 볼 중국의 안보적 필요를
감안하며 들어야 한다. 현상 타개(打開)를 위해 역사 문제의 힘을 빌려 오는 중국과 역사 문제의 무게에 눌려 현상 타개의
긴급성이 밀려나고 있는 한국의 차이가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시 주석의 한·중 관계사 강의가 능청스러웠다면 아베 총리의 북한 제재 해제 긴급 기자회견은 너무 속이 들여다보였다.
일본이 유괴 납치된 국민 구출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건 당연하다.
아베 총리가 이 문제를 자신의 지지도 회복 수단의 하나로 밀고 나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베 총리가 정말 한·일 관계를 개선할 의지를 갖고 있다면 제재 해제를 발표하는 방식과 시점을 이렇게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중국 국가주석이 서울을 방문하고 있으니 일본 총리는 평양을 상대하겠다는 식으로 비치는 자신의 회견이
한국 국민에게 어떤 불쾌한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지난 이틀 동북아 무대 위 주인공은 박근혜 대통령, 시진핑 주석, 아베 총리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 국가 지도자 모두 대화 상대 어깨너머 다른 누군가를 의식하고 있었다.
바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내년에 한·중이 공동으로 항일(抗日) 70주년 기념식을 갖자는 시 주석의 제안에
가(可)타부(否)타 대답하지 않았다.
공동성명, 공동기자회견에서도 일본 문제는 비켜 갔다. 한·미·일 연대가 흐트러지는 걸 염려하는 미국에 대한 배려다.
시 주석은 공개 강연에서 노골적으로 일본을 비판하면서도 미국은 건드리지 않았다.
아베 총리는 북한 제재 해제를 발표하면서 핵과 미사일 실험에 대한 UN 제재는 제외했다.
등 뒤로 미국의 눈길을 의식한 행동이다.
한·중, 한·일, 중·일 관계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의 하나가 미국이라는 뜻이다.
동북아는 이제 비정상이 일상(日常)이 돼버렸다.
박 대통령과 시 주석은 다섯 번이나 얼굴을 마주했는데도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
시 주석과 아베 총리는 실제론 한 번도 정상회담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 상대에 대한 의혹을 키워 왔다. 대화가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만은 아니다.
상대에 대한 오판(誤判)을 막아주는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동북아는 안전장치가 사라진 지뢰(地雷)밭이 돼가고 있다.
동북아 3국 지도자 사이의 비대칭적(非對稱的) 대화 상태의 가장 큰 책임은 아베 총리에게 있다.
국제관계에선 책임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과의 부담을 같은 비율로 나눠 지는 게 아니다.
책임의 다과(多寡)와 관계없이 상황 악화의 공동 피해자가 되는 수가 더 흔하다.
동북아는 동맹의 내용과 질이 함께 변하는 전환기다. '기회의 창(窓)'과 '위기의 창'이 수시로 열렸다 닫혔다 한다.
그제 하루 중국 바람과 일본 바람이 서울과 평양을 동시에 흔들었다.
지금 바람이 우리를 흔들고 있는지 아니면 바람보다 앞서 우리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지 냉철하게 짚어봐야 할 때다.
대한민국은 중심을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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