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일사일언 - 마음 읽기

바람아님 2014. 7. 9. 11:01

(출처-조선일보 2014.07.09 김형찬 고려대 철학과 교수)


김형찬 고려대 철학과 교수 사진학생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철학과 학생은 아니지만 지난 학기에 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며 
진로 상담을 하고 싶다고 했다. 
얼굴이 낯선 걸 보면 수업 시간에는 조용히 뒷자리에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졸업이 한두 학기 남은 공대생이었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미술 공부와 큰 어려움 없이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은 공학도의 길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공대에 진학하기 전에 명문대 미술대학에 입학해 1년쯤 다닌 적도 있다고 하니 
아주 허황한 꿈을 꾸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가 방황해 온 수년간의 이야기가 꽤 길게 계속되었고, 마침내 내가 말을 해야 할 때가 됐다.

"반년이든 일년이든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정말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해 보고 결정하게. 
안 그러면 평생 미련이 남을 거야."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대답했다. "네, 아마 그 말씀을 듣고 싶어서 찾아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그의 말을 들어줬고, 그의 마음을 읽어줬을 뿐이다. 

일사일언 칼럼 일러스트중국 당나라 시대에 스물일곱 살로 요절한 시인 이하(李賀·790~816). 말단 관직마저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있던 그가 
병들고 가난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자 시중들던 동자
(童子)가 말했다.

'주먹코인 저는 마땅히 베옷을 입어야지요(巨鼻宜山褐)/ 
눈썹 짙으신 주인님은 힘써 시를 읊으셔야지요(龐眉入苦吟)/ 
주인님이 시를 노래하지 않으시면(非君唱樂府)/ 
깊어가는 가을의 원망을 누가 알겠어요(誰識怨秋深).'


이하의 한탄 속에서 동자는 
시 창작에 대한 이하의 열망을 읽어냈고, 
주먹코를 가진 자신은 베옷을 입어야 하고 
눈썹 짙은 주인은 시를 노래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끌어대며 그를 격려했다. 
이하는 동자의 말을 빌려 위의 
시('巴童答·동자의 답가')를 지었고, 
결국 시 짓기에 몰두하여 뛰어난 작품들을 역사에 남겼다.

내가 그 학생의 동자가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동자가 이하의 선생이 되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