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 말뿐인 "내 탓이오"

바람아님 2014. 7. 9. 10:34

(출처-조선일보 2014.07.09 김태익 논설위원실)


속담에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거린다 한다"고 했다. 제 잘못은 모르고 남을 탓하거나 흉보는 마음을 꼬집는 말이다. "양식이 떨어지면 며느리 큰 손 탓을 한다"도 비슷한 말이다. 전통 민요엔 "아버지 어머니 추야장(秋夜長) 긴긴 밤에 할 일 없으면 맷돌이나 돌릴 일이지 왜 엉뚱한 것 돌려서 날 만들었나"라는 가사가 있다. 제 인생 안 풀리는 것조차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이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이 "내 잘못입니다"인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20여년 전 천주교가 벌였던 '내 탓이오' 운동은 지금 돌아봐도 대단했다. 자동차 뒤 유리에 붙이는 '내 탓이오' 스티커 40만장이 순식간에 동났다. 독재 끝에 온 민주화 열기 속에서 사람들이 이념·지역·세대·빈부로 나뉘어 서로 손가락질하며 핏대를 세울 때였다. 김수환 추기경이 앞장서 당신 차에 스티커를 붙이며 "지금은 자기를 먼저 돌아볼 때"라고 했다. '내 탓이오'라는 대중가요가 나왔고 '내 탓이오'를 주제로 시·수필·동화를 공모했다. 


[만물상] 말뿐인 ▶'내 탓이오' 운동은 천주교 '고백의 기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 하며 
가슴을 세 번 치는 의식이다. 
마태오복음은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깨우쳤다. 
탐욕과 교만, 적대감에서 비롯하는 인간의 잘못을
'지금, 여기, 나한테서부터 찾아보자'는 갸륵한 
정신 운동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내 탓'은 말보다 행동과 실천으로
완성된다. 
동양에서는 "남 탓하는 사람은 온전히 사귈 수 없고 자기를 용서하는 사람은 허물을 고치지 못한다(責人者不全交 自恕者不改過)"고 했다. 
'내 탓이오' 정신이 몇 년의 캠페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면 인간의 역사가 그렇게 아름답지 못한 일들로 얼룩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그제 국회에 나와 "인사가 잘되고 못되고 하는 것의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고 했다. 
언뜻 보면 허심탄회한 '내 탓이오' 같은데 어딘가 이상하다. 잘못의 원인이 뭐고 어떻게 고치겠다는 얘기도 없고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얘기도 없다. 
월드컵에서 홍명보 감독이 경기에 질 때마다 "모두 내 책임"이라고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청문회에 나온 몇몇 장관 후보자도 말로만 "제 불찰"이라며 빠져나간다.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면죄부를 발행하는 꼴이다. 
남 탓을 하거나 발뺌하는 것보다야 낫지만 이러다가 '내 탓이오'가 처세나 정치 수단이 돼버리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