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4.08.01 이한수 문화부 차장)
세 나라는 너무 달랐다. 지난달 초·중순 한국·중국·일본의 청일전쟁 현장을 취재했다.
올해가 120주년이다. 일본은 1894년 7월 25일 한국 아산만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국 함대를 기습했다.
이후 세 나라가 서로 다른 역사의 길을 갔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바로 지금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일본은 과거를 영광스럽게 회고하고 있었다.
일본 함대가 처음 출발한 사세보, 전함을 만든 나가사키, 전시 수도였던 히로시마 등을 돌아보며
그렇게 느꼈다. '빛나는 역사'라고 명시하고 있지는 않았다. '1882년 군함 정비 계획안에 따라
2400만엔을 들여 8년에 걸쳐 군함 32척 건조 계획을 세웠다'
'히로시마에 (전쟁 지휘 본부인) 대본영을 설치하고, 메이지 천황이 1894년 9월 15일부터
이듬해 4월 27일까지 머물렀다'…. 관련 전시관과 기념물의 안내 글은 조용히 사실을 적었다.
사세보 해상자위대 사료관에는 1945년 8월까지 침몰한 일본 함정 수를 도표로 정리했다.
태평양전쟁 중 항공모함 25척, 구축함 253척, 잠수함 170척, 순양함 42척 등 모두 502척이 침몰했다는 내용이다.
이미 70년 전에 이 같은 대규모 함대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건조한 문체로 기록한 글의 행간에서 과거 전쟁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느껴졌다.
침략 전쟁을 일으켜 다른 나라 국민뿐 아니라 일본 국민도 다수 희생됐다는 반성과 참회는 단 한 구절도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굴욕의 역사를 깊이 새기고 있었다.
청일전쟁 때 북양함대 사령부가 있던 산둥성 웨이하이의 류궁다오(劉公島)에 세운 갑오전쟁박물관은 치욕스러운 역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청은 류궁다오 함락으로 굴욕적인 패배를 맞았다, 제독 딩루창(丁汝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거액의 배상금을 내고 대만 등 영토를 빼앗겼다, 일본군의 뤼순 점령 때 중국 민간인 2만여명이 학살됐다는 내용이다.
전시관 출구에는 "갑오전쟁에서 패전한 굴욕적 역사는 '낙후하면 곧 당하게 된다'는 도리를 다시 한번 입증하였다.
우리는 이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해상 강철 장성(長城)을 구축함으로써 역사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다짐을 적었다.
한국의 현장엔 아무것도 없었다. 전문가의 안내가 없으면 어디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일본군은 풍도해전 이틀 전인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을 포로로 잡았다.
청과 일본은 7월 29일 성환 전투를 시작으로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
일본군은 한반도 남부에서 동학농민군 3만명 이상을 학살했다.
하지만 경복궁에도, 성환에도, 학살 현장에도 이를 기록한 곳은 없었다.
치욕의 현장을 지우는 것이 상처를 이기는 방법이라고 여긴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역사를 정직하게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중국인 교수는 치욕스러운 역사를 상세히 기억하는 이유에 대해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서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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