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선우정의 글로벌 터치] 아사히신문의 孤立

바람아님 2014. 8. 10. 08:20

(출처-조선일보 2014.08.09 선우정 국제부장)


선우정 국제부장 사진1987년 5월 3일 일본 아사히(朝日)신문 한신(阪神)지국 기자 2명이 사무실에 들이닥친 괴한의 총격을 

받았다. 옆구리에 총상을 입은 29세의 기자는 다음 날 절명(絶命)했다. 괴한은 사흘 후 우익(右翼) 

비밀조직 '세키호타이(赤報隊)' 명의로 일본의 통신사 2곳에 편지를 보냈다. '반일(反日) 여론을 

육성하는 아사히신문은 악질(惡質)… 아사히 사원 전원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최후의 한 명까지 

사형을 집행하겠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2001년 8월 15일 아사히신문은 종전일(終戰日)을 맞아 '역사에 대한 책임'이란 사설을 실었다. '천황의 

이름으로 모든 명령이 하달됐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천황은 전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국가 최고위에 있는 사람이 책임을 지지 않는데 어떤 신민(臣民)이 스스로 반성할 것인가.' 일왕의 

전쟁책임론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 사회에서 금기(禁忌)로 통한다.

2005년 3월 27일 아사히신문 논설주간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는 '풍향계'란 칼럼난에 "섬을 양보해 버리면… 하는 

몽상(夢想)을 한다"고 썼다. 독도 포기 주장을 내비친 것이다. 에두른 글이었지만 우익 행동대가 아사히신문사에 몰려와 

"국적(國賊), 매국노, 할복하라"며 위협했다. 와카미야는 일본 우익의 공적(公敵)이 됐다. 아사히신문은 그런 그를 6년 뒤 신문 

편집의 최고봉인 주필에 임명했다.

일본어를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에게 아사히신문은 소중한 교재(敎材)다. 오자(誤字)가 적고 문법이 정확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사히신문에서는 민족주의의 역한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좋은 사례가 재일(在日)한국인 범죄를 다루는 기사다. 다른 신문과 

달리 아사히는 용의자의 한국 이름을 적지 않는다. 대신 재일교포가 일본에서 통상 사용하는 일본 이름 '통명(通名)'을 기재한다.

단어 하나에서도 재일교포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사히신문의 발행 부수는 조·석간 합쳐 하루 1027만부에 달한다. 1320만부를 발행하는 요미우리(讀賣)신문과 함께 일본 

지식인의 담론 공간을 양분한다. 아사히와 요미우리를 흔히 진보와 보수로 구분하지만, 아사히에는 그런 잣대로 분류할 수 

없는 독보적 가치가 있다. 신문 판매에 불리한 걸 알면서도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국제주의를 존중하는 것,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걸 알면서도 과거사 반성을 요구하고 금기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사히신문은 일본의 100년 언론사(史)에서 

'양대지(兩大紙)' 위상을 잃은 적이 없다. 일본 지식사회가 깊고 넓다는 것을 증명한다.

2014년 8월 5·6일 아사히신문에 실린 특집 기사가 일본 사회를 다시 논쟁 속에 끌어들였다. 이틀 동안 5개 페이지를 할애한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직시(直視)하자'는 기사다. 아사히는 몇 가지 오보(誤報) 사례를 공개하고 정정하면서 "위안부 강제 

동원은 없었다"는 일본 주류(主流)의 주장을 다시 비판했다. 그러자 일본 사회에서 "아사히가 오류를 인정했다"는 공세가 

파상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까지 끼어들었다.

일본군위안부를 둘러싼 아사히신문의 전쟁은 20년이 넘었다. 

가해자 나라의 신문이 늘 피해자 편에서 싸웠으니 이제 외롭고 지쳐 보인다. 

지혜롭게 도울 방법이 한국 정부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