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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피해자의 처벌권'

바람아님 2014. 8. 27. 09:57

(출처-조선일보 2014.08.27 이명진 논설위원실)


셰익스피어 희곡엔 결투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삼촌 계략에 빠져 이복동생과 결투를 벌이는 햄릿
친구의 죽음에 격분해 사랑하는 줄리엣의 외사촌을 찔러 죽인 로미오…. 
중세 유럽을 살다 간 작가에게 결투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좋은 소재였던 것 같다. 
당시엔 '결투 재판(trial by combat)'도 있었다. 11세기 노르만족이 영국을 점령하면서 영국에 도입된 제도다.

결투 재판(trial by combat)은 주로 증거가 부족하거나 중재(仲裁)가 어려운 분쟁에 적용됐다. 
고소인과 피고소인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워 유무죄를 갈랐다. 민사 사건에선 대리인들이 결투를 벌였다. 
19세기 초에야 폐지됐다. 어찌 보면 법보다 주먹이 가깝던 시대의 허가받은 복수 수단이었다. 
미국에서도 1804년 재무장관 해밀턴 때문에 대통령이 못 됐다고 여긴 부통령 에런 버가 권총 결투를 신청해 
뉴저지 허드슨 강변에서 해밀턴을 쏴 죽였다.

[만물상] '피해자의 처벌권'

▶예나 지금이나 형벌의 출발점엔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준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다. 
그 일을 개인이 하면 사인(私人) 소추, 나라가 대신하면 국가 소추 제도가 된다. 
범죄를 개인 간 문제로 보는 전통이 강한 영국에선 피해자·가족이 소추권을 행사했다. 
19세기 들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유명한 법학자 제러미 벤담의 개혁 운동을 계기로 차츰 국가가 그 일을 대신하게 됐다.
과도한 적개심·복수심이 표출되고 소추가 남용되는 데다, 소추권이 변호사를 살 수 있는 부자의 전유물이 됐다는 반성의 결과다.

▶근대 형사사법 제도가 정착하면서 문명 국가에선 자력(自力) 구제나 사적(私的) 복수는 금지되고 기소는 나라가 맡는 게 
일반화됐다. 피해자에게 복수를 맡기는 나라는 찾기 어렵다. 피고인·피의자의 방어권도 크게 신장됐다. 
우리 형사소송법도 국가의 대리인인 검사(檢事)가 수사·기소를 맡도록 규정했다. 
피해자에겐 고소권을 주고, 피해자 의사가 부당하게 묵살되면 법원이 직접 기소하는 제도도 뒀다. 
피해자가 개인적인 원한을 갖고 직접 가해자 에게 복수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세월호 유족들이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기소권을 달라고 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별도 특검(特檢)이 아니라 피해자 유족이 참여하는 위원회가 처벌권까지 갖게 되면 
사실상 개인적 복수(復讐)에 해당할 수도 있다. 
유족의 답답한 심정을 남이 다 헤아리기는 힘들 것이다. 
그 때문에 '이번만 딱 한 번 예외'로 법을 만들자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그런 원칙 밖 일들이 쌓이고 쌓여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