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조선어학회 先烈 기념탑

바람아님 2014. 8. 30. 09:23

(출처-조선일보 2014.08.30 김태익 논설위원실)


대한민국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애산(愛山) 이인 선생은 걷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웠다고 한다. 

귀는 똘똘 뭉친 쪽박귀였고 엄지와 검지 손가락은 온전히 펴지 못했다. 앞니 두 개는 새로 해 박은 것이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때 붙잡혀 가 당한 고문 탓이었다.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은 당시 받은 고문을 '공중전' '해전(海戰)' '육전(陸戰)'에 비유했다. 

양 겨드랑이에 목총을 끼워 공중에 매다는 '비행기 태우기', 의자에 묶어놓고 고개를 젖힌 뒤 얼굴에 물을 쏟아붓기, 

몽둥이나 죽도(竹刀)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같은 것들이다.


▶일제 경찰은 엄동설한인데 발가벗기고 찬물을 끼얹었다. 

등에 '虛言者(허언자·헛소리하는 사람)'라고 쓰고는 방마다 돌아다니게 하는 모욕을 주기도 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썩은 콩과 소금에 절인 해초가 다였다. 

그 와중에 국문학자 가람 이병기 선생옥중 시조를 한 편 남겼다. 

"이쑤시개 바늘 삼아 해진 옷을 얽어매고

/ 밥풀을 손에 이겨 단추를 만들어 달고

/ 따뜻한 볕을 향하여 이 사냥을 하도다."



▶붙잡혀 간 33명이 모두 이 나라의 손꼽히는 학자요, 변호사요, 지식인들이었다.

조선일보 사장·주필을 지낸 안재홍, 조선일보 편집인으로 '문자보급운동'을 이끈 국어학자 장지영 선생 같은 분들도 있었다. 

결국 이윤재·한징 두 분이 감옥에서 순국했다.

광복을 맞아 풀려난 분들은 대부분 들것에 실려 나왔다.


▶발단은 함흥 어느 여고생 일기의 한 구절이었다. '오늘 국어(國語)를 사용했다가 벌을 받았다.' 여기서 '국어'는 일본어였다. 

대동아전쟁에 들어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집 안에서 마저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했다. 

경찰은 일본어 쓰는 학생에게 벌을 준 교사가 조선어학회 회원이라는 걸 알아냈다. 

당시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맞서 우리말사전 편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제는 눈엣가시 같던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를 붙잡아 들였다.


▶어제 서울 세종로 공원에서 당시 순국했거나 고초를 당한 분들 넋을 기리는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탑'이 제막됐다. 

세종대왕 동상이 지척에서 굽어보는 곳이다.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는 데 몸 바친 순국선열이 서른세 분이나 되는 나라는 달리 찾기 힘들 것이다. 

맞춤법·표준어·외래어표기법…. 

이분들 쌓은 공(功)이 없이 광복을 맞았으면 우리 어문 생활은 얼마나 다른 길을 갔을지 모른다. 

말과 글을 옳게 간수해야 국민의 얼도 바로 선다. 

조선어학회 선열들의 위대한 희생을 떠올리며 우리말과 글의 오늘을 돌아본다.


[조선어학회 先烈 기념탑] 사진

(아래 사진은 클릭하면 1024픽셀 이미지 가능)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

(전경)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수호 투쟁기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투쟁으로

투옥된 33인





혹독한 추위와 배고품,

그리고 모진 고문


함흥 형무소에서

옥사한 분



광화문 세종공원의

훈민정음 조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