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량산보와 주잉타이' 이야기입니다. 학문을 배우고 싶어 남장을 하고 학당에 들어간 주잉타이. 그런 주잉타이에게 우정도 아니고 사랑도 아닌 미묘한 감정을 느끼는 동문 량산보. 결국 주잉타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지만 여성 집안의 반대로 이루지 못합니다. 실망한 량산보는 숨지고 주잉타이 역시 따라 죽습니다. 이어 함께 나비로 환생합니다.
성적 차별에 도전하는 여성, 계급의 굴레와 싸우는 연인, 그리고 동성애적 코드까지. 고대 설화인데도 현대적인 감각이 넘쳐 흐릅니다. 덕분에 지금까지 연극과 영화, 드라마, 오페라, 뮤지컬 등 수많은 장르에서 각색되고 있습니다.
뿐만 입니까. 홍콩 배우 왕조현의 청순가련한 모습만으로 전설이 된 영화 '천녀유혼', 역시 영화화돼 우리에게도 친숙한 백사와 서생의 애틋한 연사 등 중국의 유명한 사랑 이야기는 줄을 잇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압권은 '미생지신'이라는 사자성어로 널리 알려진 '미생의 사랑'입니다.
미생은 어느날 연인과 마을 앞 냇가의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미생의 애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미생은 한나절이 넘도록 여성을 기다렸습니다.
날이 질 무렵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냇가의 물이 무섭게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차오르고 급류가 쏟아지는데도 미생은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미생이 위험에 빠진 것을 본 행인이 '빨리 몸을 피하라'고 권했습니다. 미생은 "뒤늦게라도 애인이 왔다가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알면 얼마나 실망하겠는가!"라며 다리를 껴안고 끝내 버텼습니다. 그러다 결국 물에 빠져 숨졌습니다.
'미생지신'이라는 사자성어는 그래서 약속을 위해 목숨마저 버리는 굳은 신의를 표현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융통성 없이 고지식하고 답답한 행동을 꼬집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이렇게 기라성 같은 순정남 선조들을 둔 영향인지 중국에는 사랑에 목숨을 건 남성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저도 지난해 '월드리포트'를 통해 사랑을 증명하겠다며 다리에서 뛰어내렸다가 숨진 청년의 소식을 전해드린 바 있습니다. 비슷한 뉴스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 최근 접한 한 기사 속 주인공 남성은 알쏭달쏭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범죄자입니다. 사랑했던 사람을 당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범죄에 끌어들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순정남이라니요. 그런데 사랑이란 감정을 배제하고는 해석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습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올 2월 저장성 항저우에 사는 천모라는 20대 여성은 우연히 통장을 정리하다 기절초풍했습니다. 자신의 통장에 무려 1백80만 위안, 우리 돈으로 3억 원 넘는 거액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돈을 입금한 사람을 알아보니 수개월 전에 헤어진 전 남자친구 손모 씨였습니다. 이미 헤어진 자신에게 왜 그렇게 큰돈을 보내줬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손 씨가 어떻게 그런 거액을 얻을 수 있었는지 더 의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천 씨는 이런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도 뭔가 수상쩍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손 씨에게 찾아가 자초지종을 따졌습니다. 손 씨는 펄쩍 뛰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헤어졌지만 내가 사랑했던 여성입니다. 그녀가 생활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당연합니다. 내 능력이 되는 만큼 그녀를 도와줬을 뿐입니다."
하지만 경찰은 수사를 진행하면서 손 씨를 이미 경찰의 다른 팀이 내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위조한 신용카드로 거액을 빼돌린 혐의였습니다. 지난해 5월부터 미국의 신용카드들이 국제결제를 통해 영문도 모르게 사용됐다는 신고가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용처가 모두 중국이었습니다. 이런 수상한 카드 사용 행적을 일일이 쫓으면서 손 씨가 용의선상에 떠올랐습니다. 그러던 차에 천 씨의 신고가 접수된 것입니다. 결정적 단서가 확보된 셈이었습니다. 경찰은 손 씨를 당장 체포했습니다.
손 씨는 빈 카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확보한 신용카드 정보를 입력해 다량의 불법 복제카드를 만들었습니다. "은행들은 신용카드의 비밀번호를 풀려면 엄청난 고급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하죠. 하지만 제가 해보니까 그다지 어렵지 않던데요? 저 같은 초보 해커들도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손 씨의 말입니다.
손 씨는 카드 결제기를 마련한 뒤 이렇게 만든 복제 카드로 가장 결제를 했습니다. 가짜 결제를 해서 판매 대금을 빼돌린 것입니다. 손 씨에게 카드 단말기를 판 회사는 부정사용 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습니다. 그래서 손 씨의 카드 단말기를 회수해갔습니다. 손 씨는 신분증을 위조해 새로 카드 단말기를 확보하고 계속 복제 카드를 긁었습니다. 이렇게 빼돌린 돈이 5백13만 위안, 8억7천만 원이 넘습니다.
손 씨는 이 돈을 현재의 여자친구 계좌로 돌려놨습니다. 3백33만 위안은 이 계좌로 송금했습니다. 그런데 앞서 꼬리가 밟힌 결정적 이유가 된 전 여자친구 천모 씨의 계좌에도 1백80만 위안을 보낸 것입니다. 물론 천 씨에게 사전에 아무런 상의나 귀띔도 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손 씨가 천 씨의 계좌를 이용해 돈 세탁을 하려 했던 것으로 봤습니다. 돈을 안전한 곳으로 빼돌리려 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손 씨에 대해 '신용카드 사기죄'와 '신용카드 관리 방해죄', '거류신분증 위조죄' 3가지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습니다. 최근 재판에서 모두 유죄를 인정받았습니다. 손 씨는 12년 9개월의 장기 징역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물론 카드 사기로 얻은 수익 5백13만 위안은 모두 몰수 당했습니다.
물론 손 씨는 나쁜 범죄자입니다. 처벌받아 마땅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천 씨에 대한 행동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전 여자친구 천 씨와 상의도 없이 왜 거액을 그녀의 계좌로 보냈을까요? 돈 세탁을 하기 위해서라면 미리 협박하거나, 사례를 약속하고 입단속을 시켜야 했던 것 아닌가요? 왜 하필 천 씨의 계좌를 이용하려 했을까요? 이미 헤어진 애인이 손 씨의 입장이나 처지를 고민하고 고려할 가능성이 떨어지는데 말입니다.
3억 원이라는 돈의 크기도 이상합니다. 애초에 돈을 세탁할 목적이었다면 반반씩 보내는 게 합리적이죠. 만약 천 씨를 믿지 못해 그런 것이라면 3억 원은 신뢰하지 못하는 계좌로 보낸 액수치고는 또 너무 큽니다.
때문에 저는 이렇게 추측해봤습니다.
손 씨는 전 애인에게 3억 원을 진짜 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천 씨에게 구구절절 사연을 말하면 거절당할 수 있으니까 아무 말 없이 보냈던 것 아닐까? 아직 사랑의 감정이 남아 정말 천 씨의 생활을 돕고 싶었던 것 아닐까? 손 씨가 경찰에게 처음 변명한 대로 말입니다. 그래야 모든 상황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이 가능하니까요. 손 씨의 어처구니없는 행위도 결국 먼 선조 미생의 요령부득, 막무가내식 사랑의 한 변주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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