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3.12.15 찬킹청, 홍콩 신보 총편집인)
11월 23일 중국이 동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B-52 폭격기 두 대가 중·일 영유권 분쟁 지역인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 상공을 비행하며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내며 아시아 회귀 전략을 강조했다.
그러나 중국 역시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며 26일 남중국해에서 항공모함 랴오닝호와 전함 4척을 동중국해를 거쳐 남중국해로
보내는 등 무력시위를 했다. 이는 필리핀과 베트남 등 국가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바이든 미 부통령은 12월 4일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단독회담에서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에 관해 논의했다.
논쟁의 쟁점으로 떠오른 방공식별구역은 사실 중국이 처음으로 선포한 것도 아니며, 중국만 선포한 것도 아니다.
논쟁의 쟁점으로 떠오른 방공식별구역은 사실 중국이 처음으로 선포한 것도 아니며, 중국만 선포한 것도 아니다.
중국 주변 국가의 경우 한국, 일본, 베트남 모두 자국의 방공식별구역을 설정했다. 미국은 북미, 알래스카, 괌, 하와이 등
미주대륙과 태평양에 방공식별구역을 4곳이나 설정해놓았다.
다른 나라가 이미 선례를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에만 이렇게 의심과 비난이 쏟아지는 것일까?
1990년대 초 덩샤오핑(鄧小平)은 ‘도광양회(韜光養晦·몸을 숨긴 채 실력을 기른다)’라는 외교 정책을 천명했다.
다른 나라가 이미 선례를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에만 이렇게 의심과 비난이 쏟아지는 것일까?
1990년대 초 덩샤오핑(鄧小平)은 ‘도광양회(韜光養晦·몸을 숨긴 채 실력을 기른다)’라는 외교 정책을 천명했다.
이는 국제 이슈에서 저자세를 유지하며 분쟁에 휘말려 들지 않고 경제발전에 전력 집중하는 정책이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중국의 경제가 빠르게 발전함에 따라 국제적 영향력이 커졌고 이로 인해 한 발 물러서는 도광양회 노선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그러자 중국은 21세기 외교 전략을 ‘화평굴기(和平崛起·Peaceful Rise)’로 설정하고 2003년 12월 26일
마오쩌둥 탄생 110주년 기념대회에서 후진타오 총서기가 이를 발표했다.
‘화평굴기’라는 외교전략은 90년대부터 언급되기 시작한 서양의 ‘중국위협론’에 대응한 논리이다. ‘중국위협론’은 GDP 대비
‘화평굴기’라는 외교전략은 90년대부터 언급되기 시작한 서양의 ‘중국위협론’에 대응한 논리이다. ‘중국위협론’은 GDP 대비
높은 군비지출과 국방예산 및 관련 데이터의 불투명성 등이 서양에 위협으로 작용하며 아시아 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경제발전을 최우선순위에 둘 것이며 역내 및 국제 정세의 평화 안정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역내 국가의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 계속해서 고조되는 등 중국이 평화를 강조한 것과는 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어 중국이 역내 긴장 고조 및 충돌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다.
이런 현상이 왜 나타나게 된 것일까? 중국 정부는 어떻게 해야 국제사회가 중국의 ‘화평굴기’ 외교전략의 신뢰도를 높일 수
이런 현상이 왜 나타나게 된 것일까? 중국 정부는 어떻게 해야 국제사회가 중국의 ‘화평굴기’ 외교전략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을까?
근대의 중국은 줄곧 폐쇄정책을 펼쳐왔다.
근대의 중국은 줄곧 폐쇄정책을 펼쳐왔다.
대외 확장 정책은 14세기 명(明)나라 정화(鄭和)의 대항해(1371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학자들은 정화의 대항해가
서구 열강의 영토확장 및 식민지 자원 약탈과는 다르다고 얘기한다. 명 영락제는 정화에게 삼만 명을 끌고 명나라의 국력을
널리 알리고 오라는 임무를 주었으며 정화는 이 임무를 평화롭게 수행했다.
그 후, 중국은 청나라 말기 아편전쟁(1840년) 때부터 서구열강 및 일본의 침략에 유린당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8국
연합국(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 의해 반식민지 국가로 전락했고 이런 상태가
반세기 넘게 유지되었다. 이런 침략의 역사를 극복한 중국이 왜 역내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이 되겠는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는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냉전 시기에 접어들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는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냉전 시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 미국은 자유와 개방을 대표했고, 구소련은 전제독재정치를 대표했다. 이 양대 진영이 대립하면서 세계는 두 축으로
나뉘었고, 당시 중국은 구소련의 편에 있었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고 미국은 세계 패권을 홀로
거머쥔 초대강국으로 성장했다. 그 후로 세계에서 일어나는 충돌은 모두 지역적인 문제에 그쳤으며, 이슬람의 반(反)서양
혹은 반미운동과 같은 문화 간의 충돌 또한 냉전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대립이다.
그러나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이 대립관계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중국의
그러나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이 대립관계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중국의
정치 이데올로기에는 여전히 구소련의 흔적이 남아있다.
미국에게 있어 중국은 반목의 대상이었고, 만약 평화를 주장하는 중국의 외교노선이 없었더라면 미국은 중국을 적으로
여겼을 것이며 중국의 군비증강은 세계안보의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중국이 미국의 가치관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중국은 평화를 위협한다는 이미지를 벗기 어려울 것이다.
중국이 ‘화평굴기’를 원한다면, 그 과정에서 문화적 소프트 파워를 내세우고 중국의 핵심 가치관을 세계에 알리며
자유, 평화, 민주, 법치의 기준을 국제적 수준으로 제고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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