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중앙일보 2014-12-13일자]
대여섯 살 무렵 제주 할아버지 댁에 가러 처음 비행기를 탔다. 하늘로 붕 떠오르던 순간의 아찔함, 예쁜 승무원 언니들이 나눠주던 사탕의 달콤함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행기를 처음 타본 순간은 각별하게 기억된다.
이제는 많이 대중화됐지만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여전히 특별한 ‘의례’다.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더딘 절차를 견뎌야 한다는 점부터 그렇다. 도심에서 떨어진 공항에 가고, 탑승 수속에만 1~2시간 걸린다. 물리적 시·공간을 비현실적으로 압축하며 속도에 속도를 더하는 디지털 시대에, 드물게 옛 속도감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비행기라는 게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사회계층 구도의 압축이다. 퍼스트, 비즈니스, 이코노미 클래스. 요금에 따라 승객의 지위가 달라진다. 각 칸은 커튼으로 철저히 나뉘며, 다른 칸은 들여다볼 수도 없다. 시트, 식사와 음료 메뉴, 화장실 내부까지 다르다. 자기가 낸 돈만큼 대우를 받는, 자본주의적 질서의 공간이다. 승무원의 응대 수준도 다르다.
젊은 여성 승무원들의 미소를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운 대한민국의 항공사들은 여기에 서비스를 넘어 ‘수발’ 수준의 친절을 제공한다. 퍼스트나 비즈니스 승객들에게는 무릎을 꿇다시피 한 자세로 응대한다. 승객을 위에서 내려보는 ‘불경’을 피하고 눈높이를 맞추려 몸을 조아리는 것이다. 거기서 간혹 그 권력관계에 도취된 ‘라면상무’ ‘땅콩공주’ 같은 불상사가 생긴다. 물론 ‘땅콩공주’는 더 나아갔다. 그저 ‘수퍼갑질’하는 진상 승객이 아니라 부사장이자 오너의 딸이다.
지난해 영화 ‘설국열차’는 태어날 때부터 탑승칸이 나눠지며, 뒤 칸 승객이 앞 칸으로 가기 위해 혈투를 벌이는 미래의 가상 공간을 창조했다. 영화는 시대의 메타포로 읽히며 흥행했다. 최근 ‘땅콩 리턴’에 대해 들끓는 비판 여론은 새삼 이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대중은 부당한 처사에 말 한마디 못하고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사무장에게 자신을 이입했다. 직장에 몸담고 일하는 존재란 이런 것인가? 아직도 고용관계가 주종관계인가? 일하는 자의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런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아무리 이번 경우가 특수 사례라 해도, 또 당사자들이 사건 진화에 나서도 별 소용없어 보인다. 때마침 TV에선 직장생활의 살벌함, 벼랑 끝에 내몰린 소시민들의 분투를 그린 ‘미생’이 흥행 중이다. 설국열차가 21세기 하늘을 날고 있다.
양성희 문화스포츠 부문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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