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02.06 황주리 화가)
설이 다가오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삼촌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서랍 속에서 꺼내 보여준 흑백사진 속 삼촌의 이름은 황만성.
장남인 형 대신 6·25전쟁에 참전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셨다. 삼촌은 6·25 때 행방불명된 국군으로
분류되어, 사망신고도 되지 않아 묘조차 없다. 당시로는 꽤 유명한 출판사를 경영하시던 아버지는
달 밝은 밤이면 한잔하시며, 만성이가 살아있다면 이렇게 소식이 없을 리 없다고 한탄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가끔 탈북 국군 포로가 중국 공안에 억류되어 있다거나 하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삼촌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내려앉았다. 옛날 흑백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젊은
삼촌이 어쩌면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계실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 건, 몇 년 전 북한의 탄광
지역에 아직도 생존하고 있다는 113명의 국군 포로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였다.
국군 포로로 북한에 억류되어 탄광에서 온 생을 지낸 오빠의 소식을 듣고 오열하는 할머니, 명단 중에 형제의 이름이 없다고
오열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이 났다. 물론 삼촌의 이름은 생존 국군 포로의 명단에 없었다.
아니 그것도 몇 년이 지난 일이라 삼촌의 기억은 슬며시 흐려졌다.
작년 여름 아직 너무 젊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떠나 보낸 나는, 영원히 늙지 않을 스무 살 동생의 기억을 평생 못
작년 여름 아직 너무 젊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떠나 보낸 나는, 영원히 늙지 않을 스무 살 동생의 기억을 평생 못
잊으시던 아버지의 마음이 이제야 십분 이해가 간다.
며칠 전, 6·25 때 강원도에서 전사한 김영탁 하사의 시신이 64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는 기사를 읽었다.
국방부 유해발굴사업은 2000년 6·25 50주년을 맞아 시작돼 15년 동안 8477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한다.
이 중 신원이 확인돼 유족에게 전달된 유해는 김 하사를 비롯해 100구에 불과하다는 기사를 읽으며 우리 삼촌의 유해도
남은 유해들 중 하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흑백사진 속의 스무 살 젊은 삼촌이, 오십이 갓 넘어 떠난 동생의
기억에 아파하는 나를 거꾸로 위로해주는 듯하다.
/황주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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