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9.11
[김종필의 '소이부답'] <81> 5·17 그날 밤
시위 전국 확산, 신군부 병력 집결
80년 5월 17일 JP “상황 심상찮다”
남산 당사에서 직접 차 몰고 귀가
1980년 봄 대학가 학생들은 막혔던 물꼬가 터지듯 아스팔트 위로 쏟아져 나왔다. 3월 말 조선대를 시발로 대학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엔 어용교수 퇴진과 학원 자율화 보장이 쟁점인 교내시위였다. 그러나 점차 교련 반대 요구를 거쳐 5월이 되자 ‘계엄령 철폐하라’ ‘이원집정부제 개헌음모 철회하라’는 정치적 구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부 대학 시위대는 총장실을 점거해 철야농성을 했고 급기야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두시위를 막으려는 경찰과 곳곳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학생들이 경찰을 향해 투석을 했고 경찰은 이에 맞서 최루탄을 쐈다.
5월 13일부터 사흘간 전국에서 수만 명의 대학생들이 시가지로 진출해 밤늦게까지 거리를 막고 시위를 벌였다. 수도 서울엔 서울역광장과 남대문 일대 차도가 학생 시위대로 뒤덮였다. 데모가 사흘째 계속되던 15일 경찰 차량 한 대가 불에 탔고 시위대가 파출소를 습격했다. 데모 현장에 있던 전경대원 1명이 숨지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누군가가 시내버스를 탈취해 전경대원들을 향해 돌진한 것이다. 버스를 몬 두 청년이 시위학생인지 아닌지는 분명히 가려지지 않았다. 시위대의 과격성을 부각시켜 정치 개입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신군부 세력이 벌인 공작이라는 얘기도 나돌았다.
날이 갈수록 격렬해지는 시위의 양상이 심상찮았다. 아무리 최규하 과도정부가 허약하다 하더라도 헌법 개정과 민주화를 위한 작업이 차근차근 진행돼 나가던 시점이다.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폭력시위를 벌일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시위가 과열되도록 부추기는 세력이 있는 듯했다. 사태가 악화되면 자칫 민주화 물결을 뒤엎는 구실이 될 수 있었다. 15일 신군부는 주한미군에 군부대 이동을 요청, 서울 근교의 20사단 병력(60연대와 포병단)을 서울 잠실운동장과 효창운동장에 집결시켰다.
대통령 최규하는 이 와중에 10일부터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를 방문하고 있었다. 대학가 시위로 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 대통령이 자리를 비우다니 안이한 판단이었다. 최규하는 예전에 사우디 국왕을 만난 적도 있고 하니 대통령으로서 만나면 경제적인 성과를 얻을 거라고 기대한 듯하다. 최 대통령은 시국 상황의 급격한 악화에 따라 조기귀국 건의(5월 14일 비상국무회의 결정)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일정을 하루 앞당겨 16일 밤 10시 반 귀국했다.
나는 시국수습 방안을 건의하고 협의하기 위해 17일 청와대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공화당은 긴박감이 감돌던 그 전날 16일 긴급 당무회의를 열었다. 3시간40분에 걸친 난상토론 끝에 최 대통령에게 전달할 위기관리와 수습대책을 결정했다. 정치일정을 대폭 단축하고 계엄을 해제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날 밤늦게까지 당직자들은 나의 청구동 집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입장을 정리했다.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험하게 다투던 김영삼과 김대중 양 진영도 손을 잡았다. 16일 김영삼 총재가 동교동 김대중 자택을 방문해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계엄해제와 정치일정 연내 완결 등 시국수습 9개 항을 발표했다.
5월 17일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토요일이었다. 나는 이날 아침 남산 당사로 출근했다. 전날 당무회의와 당직자회의에서 정리한 시국수습안을 검토하고 대통령 면담신청에 대한 회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낮 12시가 지나서 청와대 최광수 비서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최 비서실장은 “오늘은 대통령께서 정당대표와 만나지 않습니다. 사태의 정황을 파악한 뒤 추후 연락하겠습니다”고 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청와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는 당직자들에게 “상황이 심상찮으니 집을 비우지 말고 연락이 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뒤숭숭한 분위기여서 바깥에서 식사를 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는 남산 당사에서 승용차를 직접 몰아 청구동 집에 왔다. 그걸로 남산 당사와는 영원한 이별이 됐다.
긴장과 불길함은 가시지 않았지만 장영순 당 부의장을 비롯한 몇몇 측근과 집에서 바둑을 두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밤중에 박종규가 찾아왔다. 그가 공화당을 탈당하고 “나의 부정축재 여부에 대해 정부가 조사해달라”는 터무니없는 기자회견을 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다. 전두환의 신군부에 붙어서 나를 버리고 떠났던 그가 갑자기 왜 찾아왔는지를 알 수 없었다. 박종규는 무언가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나는 아무 말도 않고 바둑만 뒀다. 나중에야 알았다. 박종규는 신군부가 그날 밤 나를 연행하러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찾아왔던 것이다. 내게 귀띔을 해주기보다 내 동향을 파악하고 나를 집에 붙들어두기 위해 온 것이 분명했다. 내가 젊은 군 시절에 그를 끌어주고 대통령 경호실장 자리까지 마련해준 것을 생각해 보면 그의 행동은 고약한 일이다
밤 11시20분 미니버스 2대에 나눠 타고 온 군인들이 M16 소총으로 무장한 채 청구동 집에 들이닥쳤다. 군인들이 집 주위를 에워쌌고 보안사 수사관 장모 준위가 먼저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최인관 비서에게 “세상이 어지러워서 김 총재를 조용한 곳으로 모셔야겠습니다. 총재님께 보고사항이 있으니 뵙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내가 있는 2층 서재로 최인관 비서 뒤를 따라서 장 준위가 올라왔다. 그는 내게 목례를 하더니 “죄송합니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 총재님을 모시고 가야겠습니다”고 말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래층에선 총을 든 보안사 요원들이 군화를 신은 채 우당탕탕하고 집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두려워서 나 한 사람을 잡아가기 위해 무장한 군인을 20여 명 가까이 동원시켰는지 모를 일이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으니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또 신군부 세력의 첫 번째 거세 목표는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고, 나를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장 준위에게 “그래 왔구먼. 내가 희생양이 돼야 한단 말이지. 그렇다면 갑시다”고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순순히 수사관을 따라 나왔다. 놀란 아내 박영옥이 “당신들 누구야?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야?”라며 소리쳤다. 나는 아내에게 “걱정하지 마시오. 금방 돌아올 거요. 나한테 무슨 특별한 게 있나”라고 말했다. 보안사 요원에 이끌려 차에 올라 탔다. 좀 전까지 집안에 있었던 박종규는 언제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도착한 곳은 보안사의 서울 서빙고 분실이었다. 이후 7월 2일 풀려날 때까지 46일간 나는 그곳에 구금된 채 조사를 받았다.
5·17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신군부에 의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군사작전이었다. 신군부는 5월 17일 오후 9시50분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이날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미리 작성해둔 명단에 따라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급습해 체포·연행했다. 나와 김종락 형님은 이후락·김치열·김진만·오원철·장동운·이세호 등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란 죄목으로 연행됐다. 김대중과 예춘호·문익환·김동길·인명진·고은·리영희는 사회혼란 조성과 학생·노조 소요 관련 배후조종 혐의로 끌려갔다. 김영삼은 자택에 연금됐다. 신군부는 이어 모든 정치·정당 활동을 금지하고 국회의사당을 병력으로 봉쇄했다. 국회는 사실상 해산됐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국보위)가 3권을 장악한다.
일부에서는 전두환의 5·17이 5·16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전두환은 10·26 박 대통령 서거 이후 보안사 핵심참모들에게 5·16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벌써부터 음모가 계획됐던 것이다. 내가 바로 5·16의 씨를 뿌린 사람인데 그대로 따라 한 신군부의 기습에 꼼짝없이 당했다.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아니면 누군가는 내가 만든 업보라고도 하는데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고 있었다.
하지만 신군부는 5·16의 방식과 수단을 모방했을지 몰라도 그 정신은 배우지 못했다. 5·16은 국가 대개혁과 조국 근대화, 민족 각성을 위한 진정한 혁명이었다. 혁명은 횃불을 들 때부터 국민 앞에 ‘혁명’이란 모토를 떳떳하게 내걸고 궐기하는 것이다. 전두환의 5·17은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꾀를 내고 흉내를 낸 것뿐이었다. 정권 찬탈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80년은 군인이 나서야 할 만큼 위급한 시국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3김(金)이 합심해서 좀 더 일찍 시국을 수습했더라면 역사의 흐름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다. 김영삼은 김영삼대로, 김대중은 김대중대로 자신이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욕심에 가려 둘 사이에 협력이란 없었다. 결국 나를 포함한 3김은 신군부에 의해 각개격파(各個擊破)를 당했다. 역사의 대전환을 꿈꾸던 80년 서울의 봄은 이렇게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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