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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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이 서 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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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8기와 11기로 선후배 사이여서 가깝지 않으냐고도 하는데 이는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육사 11기는 자신들이 4년제 정규 육사의 첫 졸업생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전두환과 그의 하나회 멤버들은 위 기수 선배들을 무시하는 언동을 하곤 했다. 나는 공직생활 중에 군부와는 거리를 뒀다. 내가 군에 개입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경계한 사람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내가 군에 접근해서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것은 아닌지 늘 신경을 썼다. 그런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서 나 스스로 군을 멀리한 것이다.
전두환은 군에서 자기 세력을 서서히 키워갔다. 전두환을 끌어준 것은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였다. 61년 혁명 후 전두환이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원비서관으로 일할 때부터 박종규는 그와 가까이 지냈다. 73년 윤필용 사건으로 하나회의 리더인 전두환이 제거될 뻔했을 때도 박종규가 구명에 나섰다. 그의 뒤엔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전두환의 하나회를 묵인하고 지원했다. 결국 자신의 세력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 듯하다. 군부 안에서 자라던 위험한 싹을 도려내지 않고 키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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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차지철 경호실장 밑에서 작전차장보를 지냈다. 차지철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의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아마도 그는 ‘아, 권력이라는 게 잡을 만하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0·26 직후 계엄하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손쉽게 합동수사본부장 자리에 올랐고 욕심이 발동했다. 그로부터 불과 47일 뒤인 12월 12일 전두환의 신군부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 총을 들이대기에 이른다. ‘이 나라가 어디로 나가야 하는가, 나라에 어떻게 충성해야 하는가’라는 국가관이나 사명감은 하극상의 그 순간 신군부에게는 없었다. 오로지 권력을 향한 탐심이 발동됐을 뿐이었다. 그들의 총부리와 위세 앞에서 권력 주변의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엎드렸다. 불의에 맞서서 의미 있는 저항을 하거나 대적하는 이가 없었다.
12·12로 신군부가 군권을 장악하자 가뜩이나 취약했던 민주공화당 내부엔 균열이 생겨났다. 내가 짜놓은 이른바 JP 체제에 반감을 가진 세력이 전두환에게로 급격히 쏠리기 시작했다. 공화당은 내가 만든 정당이지만 나에 대한 반대세력도 두터운 기반을 갖고 있다. 반대세력의 중심은 전두환과 고향이 같은 대구·경북(TK) 세력이었다. 박준규를 중심으로 한 이들은 3선 개헌 무렵 공화당을 장악했던 4인 체제(김성곤·백남억·김진만·길재호)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TK 세력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뒤로는 이미 전두환의 신군부와 손을 잡고 있었다. 79년 연말부터 정치권에 파다하게 퍼진 ‘TK신당설’이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나는 “신당을 생각하는 사람은 당을 파괴하는 것일 뿐 아니라 역사의 파괴자”(1980년 1월 7일 당 시무식)라며 강하게 경고했다. 신당 세력의 보스로 지목된 박준규는 “나는 공화당 소속 의원 중 제일 마지막에 떠날 사람”이라며 신당 소문을 거듭 부인했다. 하지만 신당설의 연기는 계속 피어올라 당내 질서를 어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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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의 분열상은 그뿐이 아니었다. 박찬종·오유방·이태섭을 비롯한 소장파 의원 17명이 “깨끗하지 못한 인물은 당직에서 배제해 달라”는 결의문을 79년 12월 24일 내게 전달했다. 소위 ‘정풍(整風) 운동’의 시작이었다. 부정부패자와 권력으로 치부한 자가 정풍 대상으로 지목됐다. 정풍파 의원들은 “자발적인 윤리운동”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순수성을 의심하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공화당은 모래성처럼 위태로운 처지였다. 한마음으로 당의 단합을 주창해야 할 시기에 정풍을 이유로 내부 분란을 초래하고 있었다. 나는 “집안 식구 사이에 일어난 일이나 부부싸움을 이웃에 가서 고해바치는 것과 같다”(1980년 1월 31일 부산 강연)면서 정풍파를 꾸짖었다. 정풍파 의원 중 몇몇은 전두환의 신군부와 끈이 닿아 있었거나 유혹을 받았다. 내 비서실장이었던 이태섭이 훗날 전두환이 민정당을 만들 때 선두에 섰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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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태섭 비서실장에게 “이후락에게 회견 뒤에 나를 보고 가라고 전하라”고 했으나 이후락은 그냥 돌아가 버렸다. 이후락의 회견을 녹음한 테이프를 가져와 들었다. 그 내용이 어이가 없었다. “김종필 총재 선출은 불법이다. 내가 정풍 대상이라면 김종필 총재도 총재를 계속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나를 향해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자신의 부정축재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잘 살았을 뿐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실상 나는 별로 가진 게 없다”고 변명했다. 이후락의 속셈은 뻔했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리라 보고 자신이 살 궁리를 한 것이다. 나를 끌어내리고 신군부를 지원해서 자기 살길을 열고자 했다. 누구보다 권력 생존의 재간을 가진 눈치 빠른 이후락은 권력의 방향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12·12 이후 나에게도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나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신군부를 공화당의 지지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나는 만나지 않았다. 그를 만난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도 혁명으로 정권을 잡아본 사람이라서 감(感)이 있었다. 전두환의 목표는 처음부터 나와 공화당이었다.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아니었다. 나를 꼼짝 못하게 하고 박정희 대통령 이래 권력의 기반이었던 공화당을 쓸어버리는 것이 제1의 목표였다.
공화당 세력은 하나둘 신군부에게 쏠려가고 결국 나 혼자 덩그렇게 공중에 뜨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힘없는 허울뿐인 총재로 남았다. 총칼 앞에서 정당이란 것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절실히 느꼈다. 막상 군부가 움직이면 정치하는 정당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쉬이 무너지고 쉬이 도망가고 쉬이 좌절하고 주저앉아버리는 것이 정당이었다. 그 사실을 슬프게도 깨우쳤다. 몇 달 뒤 결국 공화당은 당사를 포함한 재산을 모두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에 갖다 바친다. 민주공화당 17년의 결말은 허무했다.
◆정풍(整風)운동=1979년 12월 24일 박찬종·오유방·김수·정동성·윤국로·박용기·홍성우·변정일 등 공화당 소장파 의원 17명이 당 쇄신과 변화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내면서 정풍운동이 시작됐다. 이들은 “부정부패 전력자, 권력으로 치부한 자,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 권력만 추종한 정치인들은 당을 위해 자퇴하라”며 정풍 대상으로 이후락·박종규·김진만 의원을 암시했다. 박종규와 김진만은 스스로 탈당했고 이후락은 정풍파의 배후에 김종필(JP) 총재가 있다며 JP를 정면으로 공격한다. 정풍파는 80년 2월엔 JP에 대해 “민주적으로 당헌을 개정하기 위한 임시 전당대회를 소집하자”는 주장을 폈다. JP는 정풍운동으로 내환을 맞이한 형국이었다. 결국 주동자들에게 탈당 권유 조치를 취했으나 80년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당 활동 자체가 중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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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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