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8.21
[김종필의 '소이부답'] <73> 10·26 그날 ②
혁명의 첫발 디딘 5·16의 새벽
“장도영이 날 쐈어, 쐈어, 날 쐈어”
박 소장, 믿었던 이의 배신에 분노
‘박정희의 혁명’하면 내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1961년 5월 16일 동트는 새벽, 총격전 끝에 한강 다리를 돌파하고 을지로 광명인쇄소에 그가 나타났다. 나는 밤새도록 수십만 장의 혁명 공약과 포고문 인쇄 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박정희 소장은 장도영 참모총장의 육군 헌병대가 선제 공격을 하자 타고 가던 지프차에서 내렸다. 뚜벅뚜벅 한강 인도교를 한 걸음씩 전진하는 박 소장 주변으로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 혁명군 쪽에선 선두였던 해병대가 응사했다. 다리를 건널 때 침착했던 박 소장은 가장 위험했던 그 순간을 넘기고 격한 감정을 표출했다.
1961년 박정희 소장 1961년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갓 오른 44세의 박정희 육군 소장. 박소장은 5·16 거사 직후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최고회의 의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의장에 내려앉았으나 7월 3일 장 총장이 반혁명사건으로 체포, 거세되자 의장직을 맡았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혁명의 시간, 열정의 근대화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승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자네들은 괜찮나”였다. 오후 7시40분 청와대 인근 궁정동 중앙정보부장 안가(安家)에서 박 대통령은 김재규가 쏜 배신의 총탄을 맞았다.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혈을 좌우의 두 젊은 여인이 손으로 막았다. 박 대통령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자신을 위해 울부짖는 여인들의 안전을 물었다. 18년5개월 박정희의 혁명 일생은 ‘장도영이 날 쐈어’라는 배신의 분노로 시작해 ‘자네들은 괜찮나’는 안부의 언어로 마침표를 찍었다.
혁명의 종말, 그 역사의 무대엔 피와 배신이 등장한다. 혁명의 주역들은 내부의 배신에 죽음을 맞곤 한다. 나는 박 대통령의 죽음을 보고 문득 프랑스 혁명(1789년)을 떠올렸다.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가 차례로 혁명을 이끌었다. 이들 모두 불행한 죽음을 맞았다. 그 뒤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등장해 프랑스의 영광이 시작됐다. 혁명 4년 뒤인 1793년 급진파 자코뱅당의 첫 번째 지도자 장 폴 마라는 50세였다. 그의 아파트를 25세의 샤를로트 드 코르데라는 여인이 방문한다. 반혁명 음모자들의 거처를 알고 있다고 했다. 피부병을 앓던 마라는 목욕탕에 누워 있었다. 마라가 코르데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여인은 숨겨왔던 칼을 꺼내 그의 가슴에 박았다. 절명하면서 마라가 남긴 말은 “네가?”라는 외마디였다. 로마의 시저도 자신의 암살에 가담한 양아들 브루투스를 보면서 “너마저?”라는 신음을 뱉었다. 비운에 죽어가는 혁명가의 마지막 말이 대체로 이러했는데, 박 대통령은 주위를 걱정하는 말을 남겼다.
박정희 대통령은 나라를 일으켰다. 그의 18년은 기복이 많았지만 국민들이 두 다리 펴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의 세월이었다.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아 김일성의 북한과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 기아와 극빈의 민생고를 해소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1969년 신년 휘호. 근대화 혁명이 한창이던 제2차 경제개발 계획(67~71년)의 한가운데 시점이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5·16 뒤에도 혁명은 계속됐다. 박 대통령은 근대화 혁명을 이끌었다. 근대화는 국민의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다. 정권을 뒤엎는 것보다 더 어렵다. 박 대통령은 빈곤과 체념 속에 혼미를 거듭하는 겨레에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불붙였다. 박 대통령에게 근대화는 신앙이었다. 그 토양을 조성하기 위해 절대빈곤을 추방하는 일을 먼저 했다. 5000년 민족 역사를 지배했던 항상적 굶주림, 이것을 해결해야 전근대적인 의식 구조를 넘어설 수 있었다.
일본과 국교를 수립한 건 근대화의 밑천을 장만하기 위해서였다. 박 대통령은 “과거를 따진다면 일본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지만 오늘과 내일을 위해 그들과 손을 잡았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한·일 청구권 협상을 진행하면서 매국노, 제2의 이완용 같이 욕이란 욕은 다 들었다. 박 대통령은 하야(下野)하라는 험악한 요구까지 받으면서도 국교 정상화를 밀어붙였다. 한국인의 대외 개방정신은 이렇게 해서 열렸다. 서쪽은 중국, 북쪽은 소련과 북한, 동쪽은 3000㎞ 일본 열도에 포위돼 맹장처럼 대륙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는 게 한국이다. 더 이상 폐쇄와 침체가 한국인의 숙명이어선 안 되었다.
1979년 박 대통령 1979년 5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개최된 재일거류민단 신임 간부와 유공 교포 초청행사에 참석해 찍은 사진. 보름 뒤 열린 신민당 5·30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의원이 야당 총재로 선출되면서 반유신투쟁이 다시 불붙었고 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중앙포토]
세상을 바꿔 가는 데는 고통이 따른다. 불편하고 힘든 일 없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한·일 수교와 월남 파병도 반대와 저항과 희생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혁명할 때 각오와 의지로 일관했다. 숱한 난관을 뚫고 열어젖힌 한국인의 대외 개방의식이 얼마나 귀중한지는 고립과 수구의 길을 걷고 있는 북한 정권의 오늘과 비교하면 선명하게 느껴질 것이다.
72년 유신도 박 대통령의 혁명적 발상에서 비롯됐다. 혁명은 속성상 정해진 기한이 있다. 그 기한 안에 혁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는 성질이다. 혁명의 한시성 때문에 유신은 과격하게 흘렀다. 국가를 구하기 위해 국민의 자유를 유보시켰다. 국가 지도자는 나라의 어떤 한 시기에 국가와 국민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고독한 선택을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김일성은 절정에 도달한 북한의 군사력으로 환갑잔치를 서울에서 치르겠다고 호언했다. 미국은 한국에서 지상군의 완전 철수 계획을 밝혔다. 패망으로 향하는 월남의 부패, 분열, 정쟁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국력 조직화, 능률 극대화, 자주 국방, 중화학 공업의 길로 갈 것인가. 대통령은 후자를 택했다. 이 선택은 민주주의 후퇴를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이 월남의 패색이 짙어가고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이 강력하던 74년 5월에 쓴 휘호. 국가와 민족을 강조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박 대통령은 자기가 이룬 성취에 의해 희생됐다. 혁명가의 비감한 역설이자 허망함이다. 70년대 들어 산업화의 결실로 두터워진 중산층이 자유와 민주의 열망을 갖게 됐다. 이들이 부마사태의 중심 세력이었다. 유신 말기에 권력이 고도로 집중되자 대통령의 초심이 흔들렸다. 권력의 타락이 일어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79년 10월 17일 생애 마지막 일기를 남겼다. 부마사태가 터진 날이다. “일부 반체제 인사들은 현 체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반발을 하지만 모든 것은 후세에 사가(史家)들이 공정히 평가하기를 바랄 뿐.” 은인은 잊혀도 은혜는 남는다는 말이 있다. 박정희는 잊혀도 박정희가 남긴 민족 중흥과 조국 근대화, 자주 국방과 ‘하면 된다’는 정신은 영원할 것이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소사전 수출 100억 달러=박정희 대통령은 실적과 숫자를 중시했다.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수치에 의한 목표관리 방식이었다. 1964년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한 뒤 71년 10억 달러, 77년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100억 달러 수출은 유신 체제(72년)의 국가 목표였던 자주국방, 중화학공업화 성공의 상징적 수치였다. 박 대통령은 73년 오원철 청와대 경제2수석으로부터 중화학공업화에 들어갈 재원 규모가 “10년 내 100억 달러”라는 얘기를 듣고 100억 달러에 집중했다. 81년을 목표 달성 연도로 설정했는데 4년 앞당겨 실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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