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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각하 뜻이라도 안 된다” YS 제명안에 홀로 반대표 … 서거 9일 전 박정희 “임자, 곧 부를 테니” … 마지막 만남이었다

바람아님 2015. 10. 1. 02:02

[중앙일보] 입력 2015.08.17 


 [김종필의 '소이부답'] <71> 김영삼과 부마사태
“미국, 박정희 정권에 압력 넣어야”
김영삼 NYT 인터뷰에 대통령 분노
“사대주의자는 국회에서 내쫓아라”

1971년 7월 5일 김종필(당시 45세) 국무총리가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열린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 리셉션에서 신민당 김영삼(44) 의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5월 총선(8대) 결과 제1 야당인 신민당이 약진했다. 행정부로서는 야당의 국정 협조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였다. [사진 김종필 전 국무총리 비서실]

1979년 10월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별실에서 공화당과 유정회 여당 단독으로 본회의가 열렸다. 김영삼(YS) 신민당 총재 제명안을 표결하기 위한 회의였다. 당연히 본회의장에서 투표가 진행돼야 하지만 신민당 의원들이 회의장을 점거하는 바람에 백두진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해 회의실을 별실로 옮긴 것이다. 제명안 투표는 10분 만에 끝났다.

백두진 의장은 “출석 의원 159명 중 159표로 가결됐다”고 선포했다. 의정 사상 야당 총재에 대한 첫 국회의원직 제명이었다. 하지만 당시 공화당 총재상임고문으로 5선 국회의원이었던 나는 분명히 “이건 안 된다”며 부표(否票)를 던졌다. 그런데 내 반대 한 표는 어디로 가고 어떻게 해서 만장일치가 됐는지 알 길이 없다. 급한 김에 검표위원들이 제대로 찬반 판별을 하지 않았든가 백 의장이 일방적으로 투표 결과를 발표했든가 했을 것이다.

 사실 전날 YS 제명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3일 오전 충남 서산농장에 내려가 있던 나에게 당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긴급협의를 위한 고문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에서 오찬 회의가 열렸다. 박준규 당의장 서리가 대통령의 지침이라며 YS 제명을 강행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했다. 나는 “아무리 대통령의 뜻이라 해도 세상에는 안 되는 일이 있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이효상 고문도 내 말에 공감을 표시했지만 분위기는 제명 쪽으로 흘러갔다.

 김영삼 총재를 제명한 직접적 원인은 미국 뉴욕타임스 9월 16일자 인터뷰 기사였다. 그는 서울 상도동 자택으로 찾아온 뉴욕타임스 도쿄 특파원과 인터뷰에서 “미국은 국민과 끊임없이 유리되고 있는 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히 할 때가 왔다” “미국은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서만 박 대통령을 제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격노(激怒)했다. 한국의 정치인이 국내 문제를 외국 언론에 고자질해서 해결하려는 발상을 참을 수 없어 했다.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인 대통령의 눈에 김 총재의 행태는 명백한 사대주의로 비쳤다.

 이 점에서는 나도 박 대통령과 의견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다. 뉴욕타임스 보도 이후 YS를 만나 직접 얘기했다. 나는 “왜 우리나라 문제를 다른 나라에다 얘기하느냐. 대통령 욕을 꼭 외국 신문에다 해야 했느냐. 그건 옳지 못하다”고 했다. 하지만 YS는 “아, 국내가 잘 안 되니까 외국에 얘기해서 역수입하게 한 거 아니냐”며 수긍하지 않았다.

 YS는 자신에 대해 “돌려 말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도 화가 나면 전후좌우 생각하지 않고 마구 직선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고집도 셌다. 오랫동안 야당 생활을 해온 사람들의 전형적인 성격이었다. YS가 대통령이 된 뒤의 일이지만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한꺼번에 형무소에 몰아넣는 결단은 누구도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었다. 나는 그 점에서 YS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YS는 타협을 몰랐다. 정치라는 건 타협의 산물인데 그걸 거부하니 정치가 온전하게 펼쳐지지 않았다. YS는 국회에서도 박 대통령을 좋게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좋은 얘기도 자꾸 하면 흠이 나오는 법인데, 나쁜 얘기를 계속해서 해대니까 그게 쌓여서 대단한 증오로 변했다. 박 대통령도 반발심이 생겨 “저런 친구가 국회에 있으면 국회를 버린다. 내쫓아야 한다”고 얘기하곤 했다.

 박 대통령은 처음부터 싫어했던 김대중과 달리 YS에 대해서는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호감을 가졌다.

월남 패망 후인 75년 5월 21일 박 대통령은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YS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영수회담의 분위기는 더없이 좋았다. 두 사람은 배석자 없이 두 시간가량 긴밀한 얘기를 나눴다. 회담이 끝나고 박 대통령은 본관 현관까지 걸어 나와 김영삼 총재를 배웅하기도 했다.

 회담 내용은 비공개였지만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은 “박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는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여야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한때 극한으로 치닫던 여야 관계는 이때를 계기로 정상화되는 기미를 보였다. 이듬해 당권이 YS로부터 이철승 대표로 넘어가면서 78년 말까지 정치권에서 큰소리는 별로 나지 않았다.



 79년 5월 YS는 선명 야당 회복을 외치며 신민당 총재에 다시 올랐다. 비타협적인 YS노선으로 인해 정국은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8월 172명의 공장 여공이 마포 신민당사에 들이닥쳐 회사 폐업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이 최루탄과 곤봉으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근로자 1명이 추락사했다. 김영삼 총재가 강제로 끌려 나오고 국회의원, 기자 등이 폭행당하는 ‘YH무역 사건’이 터진 것이다. 박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는 피할 수 없는 대결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이어 9월엔 신민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일부 대의원의 자격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YS의 총재 선출이 무효라는 법원의 가처분 결정이 내려졌다. YS의 정치생명을 법적으로 끊어 버리는 수순이었다. 겉으론 여야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뒤엔 박 대통령을 향해 충성 경쟁을 벌이던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무리한 정치 공작이 작동하고 있었다.

 결국 김영삼 총재는 박 대통령의 하야 요구와 함께 정권 타도를 선언했다. YS의 투쟁은 뉴욕타임스 인터뷰로 절정에 달했고 그 반작용으로 국회의원직 제명 사태에 이르렀다. YS 제명은 그렇지 않아도 끓어오르던 반(反)유신 정국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10월 13일 신민당 소속 의원 66명 전원이 김영삼 총재의 제명에 항의하는 뜻에서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통일당 의원 3명도 뜻을 같이했다.

10·26을 9일 앞둔 1979년 10월 1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유신선포 7주년 기념연회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정재호 유정회 대변인, 문형태 공화당 의원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왼쪽 둘째부터). [중앙포토]

부산에 계엄령이 내려진 1979년 10월 18일 계엄군이 탱크·장갑차를 몰고 시내에 진주했다. [중앙포토]

 10월 16일 김영삼 총재의 지역구(부산 서-동구)가 있는 부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부마(釜馬) 사태’의 시작이었다. 부산시청 앞과 광복동 일대 거리에 대학생과 시민 등 수천 명의 시위 인파가 몰려나와 “유신 철폐” “김영삼 총재 제명을 철회하라”와 같은 구호를 부르짖었다. 부산의 신문사와 방송국·경찰서·경남도청 등이 습격당했고, 경찰차량도 곳곳에서 불태워졌다. 유신 이후 처음 일어난 시민들의 항쟁이었다.

 부산 소요가 확산하던 10월 17일 오후 6시 청와대 영빈관에서 유신 선포 7주년 기념연회가 열렸다. 내가 대통령을 뵌 지 벌써 5개월이 지났다. 그간 박 대통령은 나를 당 총재상임고문에 앉혀 놓고는 따로 부르지도 않았고, 나도 특별히 할 얘기가 없어 들어갈 일이 없었다.

 만찬장에는 장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 등 여권 인사들이 몰려와 있었다. 헤드테이블에는 박 대통령과 나, 백두진 국회의장, 정일권·이효상 총재 고문, 태완선 유정회 회장, 박준규 당의장 서리 등 7명이 앉았다.

 만찬 초반엔 화기가 돌았다. 박 대통령이 그해 농작물 작황과 대전 전국체전, 의원 외교 등을 주제로 얘기를 많이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여흥이 이어졌다.

 하지만 헤드테이블의 분위기는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식사 중 구자춘 내무부 장관이 들락날락거리면서 몇 차례 박 대통령에게 부산의 소요 사태가 악화하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박 대통령이 굳은 표정으로 “당장 진압시켜라”고 지시했다. 구 장관은 “오늘 하루 종일 부산에 내려가서 다 지시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젠 마산도 들썩거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얼굴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렇잖아도 나는 청와대에 오기 전에 부산 상황이 심상찮다는 얘기를 듣고 왔던 터였다. 걱정이 돼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렇다고 아무 권한 없는 총재고문의 입장인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만찬이 끝날 즈음 박 대통령은 나에게 “임자, 요새 뭐 하고 지내? 내가 곧 부를 테니 연락하거든 들어와”라고 하셨다. 그게 박 대통령을 살아서 뵌 마지막 장면이었다. 걱정스러운 시국에 뭔가 불길한 마음이 들어 이제나 저제나 대통령의 연락을 기다렸는데 잊어버렸는지 부를 이유가 없어졌는지 그 후론 무소식이었다.

 그날 밤 박 대통령은 청와대로 돌아가 김계원 비서실장과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정보부장, 구자춘 내무부 장관, 노재현 국방부 장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과 대책회의를 열었다. 최규하 총리는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밤 11시에 국무회의를 열어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 비상계엄령 선포를 의결했다. 공수부대가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위 진압에 나섰다.

공수부대 출동은 경호실장 차지철의 아이디어였다. YS와 신민당, 부마 사태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차지철과 김재규는 사사건건 충돌했다. 그때마다 박 대통령은 김재규를 꾸짖으며 차지철의 손을 들어줬다. 10·26을 일주일 남짓 앞둔 권력 내부의 아슬아슬한 풍경이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인물 소사전 백두진(1908~93)=79년 ‘백두진 파동’의 주역. 유정회 의원이던 백두진은 79년 3월 국회의장에 선출됐다. 야당인 신민당은 “국회의장은 지역구 출신 의원이 돼야 한다”, 여당은 “유정회 출신 반대는 체제 도전”이라고 맞서 여야 갈등이 첨예화됐다. 백두진 선택의 배후엔 차지철 경호실장이 있었다. 백두진은 일제시대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재무부 장관과 국무총리에 이어 박정희 정부에서도 국무총리(70년), 국회의장(71·79년)을 지냈다. 5선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