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8.19
[김종필의 '소이부답'] <72> 10·26 그날 ①
1979년 10월 26일 저녁 나는 언론사 사장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서울 한남동의 음식점이었다. 그날 낮 충남 아산·당진에서 있었던 대통령 행사가 화제에 올랐다. 아산에선 주변 4개 시·군 지역을 전천후 농업단지로 개발하기 위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이 열렸다. 방조제 건설은 삽교천 하구에 아산과 당진을 잇는 길이 3360m, 최대 너비 168m, 높이 12~18m의 둑을 만드는 거대 토목공사였다. 주무장관으로서 공군 1호 헬기에 올라타 대통령을 수행한 이희일 농수산부 장관은 기내의 박 대통령이 소풍 나온 아이처럼 유쾌한 표정이었다고 훗날 내게 전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른 가을 하늘에서 박 대통령은 추수가 끝난 조국의 들판을 흡족하게 내려다보았다. 부마사태로 무겁고 어두웠던 대통령 모습도 오랜만에 밝아진 느낌이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혁명 뒤 제일 먼저 달려들었던 과제는 보릿고개를 없애는 일이었다. 그 자신이 빈농의 아들로 굶주림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었다. 대통령은 댐을 건설하고 신종 볍씨를 만들고 농지를 개량하는 일을 특히 좋아했다. 대통령은 이날 생애 마지막 공식 연설을 했다. “국토 개발이 국력의 원천이며 삽교천 방조제의 준공으로 홍수와 가뭄이 없는 살기 좋은 농촌이 될 것입니다.”
한남동 음식점에서 얘기를 나누던 중 한 참석자가 묘한 말을 했다. “오늘 낮 아산 도고호텔 앞마당에 대통령 일행이 탄 헬기 세 대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렸답니다. 헬기가 착륙하는 소리에 놀라 사육장에서 키우던 새끼 밴 어미 사슴이 날뛰면서 헬기 뒤꼬리 프로펠러에 부딪쳐 죽었다고 하네요.” 순간적으로 가슴에 서늘한 것이 스쳐갔다. 뭔가 불길한 기분에 등이 오싹했다.
거의 동시에 육사 동기(8기)인 손달용 치안본부장(지금의 경찰청장)이 음식점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아이고 거기 계셨습니까. 청와대가 이상합니다. 무슨 사건이 벌어진 것 같은데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짐짓 넘겨짚으면서 “왜, 1·21 사태 때 김신조처럼 누가 또 내려왔나”라고 물으니 손 본부장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여간 분위기가 심상찮습니다”고 했다. 뒤숭숭한 마음에 자리를 파하고 집에 들어오자 이번에는 박승규 청와대 민정수석한테 전화가 왔다. 그는 “그동안 어디에 계셨습니까. 빨리 들어오시라”며 엉엉 울기부터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다그쳤다. 박 수석은 “각하께서 변을 당하신 것 같다”는 말만 했다.
밤 10시쯤 잔뜩 어지러운 마음으로 청와대로 들어가는데 입구에는 놀랍게도 검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5·16 때가 생각났다. 새벽 미명 혁명군이 육군본부를 들어가는데 그곳을 지키던 헌병들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혁명군이 우르르 트럭에서 내려 들이치니까 겁을 집어먹고 내뺀 것이다. 10·26의 밤에도 청와대 정문은 뻥 뚫려 있었다. 주변에서 본관에 이르는 동안 사람 없는 바리케이드들만 겹겹이 쳐져 있었다. 큰일이 나도 단단히 났구나 싶었다. ‘각하를 지키는 일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며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짐하던 청와대 경호 병력들은 다 어디로 갔나. 대통령 유고(有故)라는 비상상황에서 줄행랑을 놓았나. 아마도 대통령이 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총기를 난사한 자들이 청와대로 쳐들어오는 게 아닌가 해서 모두 도망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여차하면 제 살 궁리부터 먼저 하는 게 인간 세상의 이치인 모양이다. 2000년 전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 뱉어낸 “하늘의 도가 도대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天道是也非也)”라는 한탄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청와대 본관에 도착했다.
나를 맞은 박승규 수석이 “김계원·김재규·차지철이 참석한 만찬에서 대통령이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한다”고 말했다. 김계원 실장한테 들은 얘기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박 수석도 잘 모르고 있었다. 자정을 한참 넘긴 새벽 3시, 나는 청와대 본관 1층의 작은방에 있었다. 74년 8월 15일 세상을 뜬 육영수 여사가 생전에 외빈(外賓)을 접견할 때 썼던 방이다. 여사가 돌아가신 뒤엔 거의 사용하지 않던 공간이었다. 방엔 두 개를 겹쳐 붙인 테이블 위에 하얀 시트가 깔려 있었다.
덩그러니 누워 있는 몸,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가까이에서 살폈다. 눈은 가볍게 감겨 있고 일자(一字) 입술은 검푸르렀다. 편안하고 깨끗한 얼굴이었다. 귀 뒤쪽 총상의 흔적만 아니라면 아흐레 전 뵈었던 대통령의 살아 있는 표정 그대로다. 어린아이같이 조그마했다. 이렇게 작은 분은 아니었는데…. 대통령의 죽음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주검이 떠오른다. 그런 상황에서 왜 그런 상념이 일었는지 박 대통령의 작은 체구가 실감나지 않아서일까. 케네디의 연설문 작성자였던 시어도어 소런슨은 암살당해 텍사스주 댈러스 병원으로 실려온 케네디 대통령을 보고 “대통령이 드러누웠는데 그렇게 큰 키는 살아 있을 땐 상상도 못했다. 누여 놓은 침대보다 컸다. 그는 참으로 자이언트(거인)였다”라고 썼다. 케네디 대통령의 키는 1m83㎝다. 살아서 그림자가 컸던 대통령이었는데 죽어서 더 커 보였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은 1917년 동갑이다. 박 대통령은 혁명정부의 불안이 가시지 않은 최고회의 의장 시절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를 만났다. 61년 11월 14일 케네디는 “도전에 대한 대응, 나라가 직면한 문제들을 정공법으로 맞서 그 해결책을 기어이 도출해내는 귀하(박정희)의 감동적인 노력이 마음에 크게 와 닿았다”고 말했다. 도전과 정공법은 두 지도자가 함께 나눠가진 속성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혁명에서, 케네디는 쿠바 사태(62년 10월)에서 그 용기를 보였다. 박 대통령은 “본인은 붕괴 직전에 직면한 조국을 불가피하게 구출해야 한다고 느꼈다. 우리의 입장은 국가의 생명을 건지고 병든 곳을 제거해야만 하는 외과의사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며 5·16 혁명에 대한 이해를 요청했다. 2년이 지난 63년 11월 25일, 박 대통령은 또다시 워싱턴을 방문했다. 이번엔 암살된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케네디가 서거한 소식을 나는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충남 부여에서 들었다. 서울의 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각하, 케네디의 장례식에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고 건의했다. 박 대통령은 “내가 갈까 말까 그러고 있었는데…그래 가지”라고 결심했다. 세계 각국에서 조문 사절이 줄을 이었는데 박 대통령은 하필이면 포플러 나무같이 큰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나란히 서서 걸었다. 서울에서 그 모습을 TV로 지켜봤는데 1m96㎝인 드골과 박 대통령의 키가 대비돼 내 인상에 남아 있다.
박 대통령의 시신을 들여다보는 나의 감회는 케네디의 주검을 봤던 소런슨과 달랐다. 내 마음속 박 대통령은 늘 거인이었다. 그러나 그날 대통령의 몸집만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았다. 작고 또 작아 보였다. 살아서 그림자가 컸던 대통령이었으나 영혼을 떠나보낸 모습은 어린애같이 가벼운 듯했다. 소런슨의 회고를 떠올리면서 나는 문득 영어 한 문장을 읊조렸다. ‘He is not a big man, but a big man’. 거인이 아니면서 거인인 분-. 박정희의 마지막은 내게 그런 분이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1979년 10월 26일 오전 11시 박정희 대통령이 충남 당진의 삽교호 준공식에 참석해 방조제의 배수갑문을 여는 버튼을 누르고 있다. 이날이 박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행사가 됐다. 왼쪽부터 이규홍 농업 진흥공사 사장, 박 대통령, 이희일 농수산부 장관, 손수익 충남도지사, 장영순 공화당 의원. 같은 날 저녁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을 시해하는 10·26 사건이 벌어졌다. [중앙포토]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열흘 전 발생한 부마사태는 차지철과 김재규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 시기에 박 대통령의 하루는 대부분 차지철의 대면 보고부터 시작했다. 김계원 비서실장과 김재규 정보부장은 늘 그 다음 순서였다. 대통령의 귀를 먼저 장악해 선입견을 심어놓은 차지철을 김재규는 당해내지 못했다. 김재규는 사태 처리의 주도권을 빼앗겼다. 차지철이 아이디어를 내고 박 대통령은 지시하고 뒤처리는 김재규가 맡아 하는 형국이었다. 김재규가 뒤처리를 잘하면 차지철의 공으로 돌아가고 뒤처리를 못하면 김재규의 책임이 되는 일이 반복됐다. 박 대통령은 10월 25일 부마대책회의에서 “정보부장은 뭐하고 있어. 정보활동과 초동대응, 모두가 실패잖아”라고 질책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다 차지철의 장난이다.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발작증이 있는 중앙정보부장의 마음에 붉으락푸르락 분노가 쌓여갔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나는 언론사 사장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서울 한남동의 음식점이었다. 그날 낮 충남 아산·당진에서 있었던 대통령 행사가 화제에 올랐다. 아산에선 주변 4개 시·군 지역을 전천후 농업단지로 개발하기 위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이 열렸다. 방조제 건설은 삽교천 하구에 아산과 당진을 잇는 길이 3360m, 최대 너비 168m, 높이 12~18m의 둑을 만드는 거대 토목공사였다. 주무장관으로서 공군 1호 헬기에 올라타 대통령을 수행한 이희일 농수산부 장관은 기내의 박 대통령이 소풍 나온 아이처럼 유쾌한 표정이었다고 훗날 내게 전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른 가을 하늘에서 박 대통령은 추수가 끝난 조국의 들판을 흡족하게 내려다보았다. 부마사태로 무겁고 어두웠던 대통령 모습도 오랜만에 밝아진 느낌이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혁명 뒤 제일 먼저 달려들었던 과제는 보릿고개를 없애는 일이었다. 그 자신이 빈농의 아들로 굶주림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었다. 대통령은 댐을 건설하고 신종 볍씨를 만들고 농지를 개량하는 일을 특히 좋아했다. 대통령은 이날 생애 마지막 공식 연설을 했다. “국토 개발이 국력의 원천이며 삽교천 방조제의 준공으로 홍수와 가뭄이 없는 살기 좋은 농촌이 될 것입니다.”
한남동 음식점에서 얘기를 나누던 중 한 참석자가 묘한 말을 했다. “오늘 낮 아산 도고호텔 앞마당에 대통령 일행이 탄 헬기 세 대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렸답니다. 헬기가 착륙하는 소리에 놀라 사육장에서 키우던 새끼 밴 어미 사슴이 날뛰면서 헬기 뒤꼬리 프로펠러에 부딪쳐 죽었다고 하네요.” 순간적으로 가슴에 서늘한 것이 스쳐갔다. 뭔가 불길한 기분에 등이 오싹했다.
거의 동시에 육사 동기(8기)인 손달용 치안본부장(지금의 경찰청장)이 음식점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아이고 거기 계셨습니까. 청와대가 이상합니다. 무슨 사건이 벌어진 것 같은데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짐짓 넘겨짚으면서 “왜, 1·21 사태 때 김신조처럼 누가 또 내려왔나”라고 물으니 손 본부장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여간 분위기가 심상찮습니다”고 했다. 뒤숭숭한 마음에 자리를 파하고 집에 들어오자 이번에는 박승규 청와대 민정수석한테 전화가 왔다. 그는 “그동안 어디에 계셨습니까. 빨리 들어오시라”며 엉엉 울기부터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다그쳤다. 박 수석은 “각하께서 변을 당하신 것 같다”는 말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알린 당시 석간 중앙일보의 1979년 10월 27일자 1면. [중앙포토]
나를 맞은 박승규 수석이 “김계원·김재규·차지철이 참석한 만찬에서 대통령이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한다”고 말했다. 김계원 실장한테 들은 얘기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박 수석도 잘 모르고 있었다. 자정을 한참 넘긴 새벽 3시, 나는 청와대 본관 1층의 작은방에 있었다. 74년 8월 15일 세상을 뜬 육영수 여사가 생전에 외빈(外賓)을 접견할 때 썼던 방이다. 여사가 돌아가신 뒤엔 거의 사용하지 않던 공간이었다. 방엔 두 개를 겹쳐 붙인 테이블 위에 하얀 시트가 깔려 있었다.
박근혜 영애가 국군서울지구병원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청와대로 모셔왔다. 김계원 실장이 그 뒤를 따라왔다. 나는 앰뷸런스에 실려온 대통령의 몸을 안아 시트에 눕혀 드렸다. 1m56㎝의 키. 박 대통령은 오른쪽 가슴과 오른쪽 귀밑머리, 두 군데에 총탄을 맞았다. 심장의 박동이 멎은 지 7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머리 뒤쪽에선 아직도 허연 진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근혜 영애는 흰 수건으로 진물을 닦아 드렸다.
덩그러니 누워 있는 몸,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가까이에서 살폈다. 눈은 가볍게 감겨 있고 일자(一字) 입술은 검푸르렀다. 편안하고 깨끗한 얼굴이었다. 귀 뒤쪽 총상의 흔적만 아니라면 아흐레 전 뵈었던 대통령의 살아 있는 표정 그대로다. 어린아이같이 조그마했다. 이렇게 작은 분은 아니었는데…. 대통령의 죽음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주검이 떠오른다. 그런 상황에서 왜 그런 상념이 일었는지 박 대통령의 작은 체구가 실감나지 않아서일까. 케네디의 연설문 작성자였던 시어도어 소런슨은 암살당해 텍사스주 댈러스 병원으로 실려온 케네디 대통령을 보고 “대통령이 드러누웠는데 그렇게 큰 키는 살아 있을 땐 상상도 못했다. 누여 놓은 침대보다 컸다. 그는 참으로 자이언트(거인)였다”라고 썼다. 케네디 대통령의 키는 1m83㎝다. 살아서 그림자가 컸던 대통령이었는데 죽어서 더 커 보였다는 것이다.
1963년 11월 25일 거행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마카파갈 필리핀 대통령,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 보두앵 벨기에 국왕, 프레데리카 그리스 여왕, 드골 프랑스 대통령등과 함께 영결식이 열리는 세인트매슈성당을 향해 걷고 있다(앞줄 오른쪽 끝에서부터). [중앙포토]
박 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은 1917년 동갑이다. 박 대통령은 혁명정부의 불안이 가시지 않은 최고회의 의장 시절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를 만났다. 61년 11월 14일 케네디는 “도전에 대한 대응, 나라가 직면한 문제들을 정공법으로 맞서 그 해결책을 기어이 도출해내는 귀하(박정희)의 감동적인 노력이 마음에 크게 와 닿았다”고 말했다. 도전과 정공법은 두 지도자가 함께 나눠가진 속성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혁명에서, 케네디는 쿠바 사태(62년 10월)에서 그 용기를 보였다. 박 대통령은 “본인은 붕괴 직전에 직면한 조국을 불가피하게 구출해야 한다고 느꼈다. 우리의 입장은 국가의 생명을 건지고 병든 곳을 제거해야만 하는 외과의사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며 5·16 혁명에 대한 이해를 요청했다. 2년이 지난 63년 11월 25일, 박 대통령은 또다시 워싱턴을 방문했다. 이번엔 암살된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케네디가 서거한 소식을 나는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충남 부여에서 들었다. 서울의 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각하, 케네디의 장례식에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고 건의했다. 박 대통령은 “내가 갈까 말까 그러고 있었는데…그래 가지”라고 결심했다. 세계 각국에서 조문 사절이 줄을 이었는데 박 대통령은 하필이면 포플러 나무같이 큰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나란히 서서 걸었다. 서울에서 그 모습을 TV로 지켜봤는데 1m96㎝인 드골과 박 대통령의 키가 대비돼 내 인상에 남아 있다.
박 대통령의 시신을 들여다보는 나의 감회는 케네디의 주검을 봤던 소런슨과 달랐다. 내 마음속 박 대통령은 늘 거인이었다. 그러나 그날 대통령의 몸집만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았다. 작고 또 작아 보였다. 살아서 그림자가 컸던 대통령이었으나 영혼을 떠나보낸 모습은 어린애같이 가벼운 듯했다. 소런슨의 회고를 떠올리면서 나는 문득 영어 한 문장을 읊조렸다. ‘He is not a big man, but a big man’. 거인이 아니면서 거인인 분-. 박정희의 마지막은 내게 그런 분이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박승규(1932~2012)=1979년 10·26 때 청와대 민정수석. 부마사태 여론 동향 분석과 대통령 친·인척 관리업무를 수행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뒤 김계원 비서실장이 소집한 수석비서관 회의에 참석해 상황 설명을 했다. 충남 홍성 출신으로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 71년 사정담당비서관에 발탁, 청와대에 들어갔다. 80년 초대 환경청장을 지냈으며 91년에는 한보그룹 회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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