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0.19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95> YS와 결별하다
공직자 재산등록,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과 전두환·노태우 처벌 등은 국민 지지가 높았다. 업적으로 내세울 만하다. 하지만 이른바 국정개혁들이 장기적인 국가운영의 틀에서 이루어지기보다 여론을 의식하는 깜짝 선포가 허다했다. 개혁 조치들은 방향과 속도, 설득의 3요소가 조화를 이루면서 국민과 호흡을 같이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의견을 말하면 김 대통령은 합당의 파트너이자 집권당 대표인 나한테조차 “씰데없는 소리 말라”고 종종 쐐기를 박았다.
대통령은 군(軍)과 정보, 사정(司正)권력을 틀어쥐고 행정부의 전권을 행사한다. 또 집권당 총재라는 위치에서 국회를 움직이며 대법원장 임명권 등으로 사법부에까지 미묘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니 누구든 대통령이 되면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게다가 절대 권력자 앞에서 그의 생각에 거스르는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다 옳다는 독선과 독단에 빠지기 쉽다. 청와대에 들어가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나의 정성을 깎아내리고 시종일관 끌어내리려 한 건 YS 민주계(상도동계)의 강경파였다. 그 선봉에 최형우 의원이 있었는데 그는 마치 내가 YS의 후계 자리라도 노리는 사람처럼 의심하고 견제했다. 최형우는 민주계의 실세로 YS의 ‘좌동영 우형우’(왼쪽의 김동영, 오른쪽의 최형우.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의 1등공신이라는 뜻. 김동영은 대선 한 해 전인 91년 사망했다)로 불렸다. 최형우는 그가 따르던 YS처럼 권력세계는 쟁취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최형우는 민자당 사무총장 시절 당 대표인 내가 “개혁에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개혁은 대통령 취임 후 6개월 안에 하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다”고 묵살하는가 하면 내무부 장관 재임 중 “이제 민자당에서 대표체제는 없어져야 한다”(94년 12월 13일)고 노골적으로 나의 퇴진을 주장했다. 김 대통령은 한편으로 최형우의 무례(無禮)에 호통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정부의 세계화 준비는 끝났다. 이제 당의 세계화를 추진할 차례”(94년 12월 27일)라며 나를 압박했다. ‘세계화’라는 단어가 본래 의미와 달리 어처구니없게 당 지도체제 흔들기로 등장했다. 대통령이 이런 언급을 하고 나면 민주계와 청와대 등 익명의 관계자들이 언론에 ‘JP 거세작전’ ‘JP 대표 퇴진 확실’ 같은 얘기를 흘렸다. 당의 세계화 목록엔 당명, 로고, 정강의 개정이 포함돼 있었다. 민자당은 명칭 자체가 3당 합당의 산물이고 노태우·김영삼·김종필 세 사람 협력체제의 상징이었다. 여소야대의 불안정 시대를 극복해 북방외교의 국가적 목표를 완수하고 보수대연합의 기반을 다져간 건 누가 뭐래도 민자당의 자부심이었다.
나는 스스로 물었다. 여기서 YS와 함께 갈 것인가. 아니면 그와 결별할 것인가. 김영삼과 그의 세력이 말하는 ‘민자당의 세계화’는 결국 그가 홀로 지배하는 친정(親政)체제의 확립, 즉 나의 2선 후퇴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 청구동 집에서 나는 고뇌하고 고민했다. 누구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결별도 나의 정치운명이다. YS와는 여기까지다. 그와 어려움은 함께했지만 즐거움은 같이할 수 없다. 고잉 마이웨이(Going my way), 나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95년 1월 10일 김 대통령이 불러 나는 청와대에 들어갔다. 청와대는 극비회동이라며 보안을 당부했다. 김 대통령은 내게 “당을 쇄신하는 마당에 당명만 바꿔선 곤란하다. 당직 선출을 경선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돌려서 말하긴 했으나 나한테 당 대표직을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나는 그동안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놨던 답변을 내놨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당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대통령은 얼떨결에 “에~? 나가서 뭘 하려고요”라고 묻곤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대표를 내려놓으라는 요구에 아예 당을 떠나겠다고 하니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내가 “뭘 하든 상관 있겠습니까”라고 정색을 하자 그는 “그러면 전당대회만은 치러달라”고 했다. 이것이 민자당에서 나와 YS의 마지막 만남이다.
YS는 훗날 회고록(2001년)에서 “만약 그때 내가 김종필씨의 청구동 자택으로 찾아가 내 본심을 전했다면 탈당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탈당은 나의 정치역정 가운데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사건 중 하나다”라고 썼다. YS의 진심이 묻어 있긴 하지만 그가 오해한 것이 있다. YS가 날 찾아와 본심을 전했더라도 나는 탈당했을 것이다. 나에겐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 마일이 더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진정한 정치목표는 의원내각제였고 그것은 내 정치생애 제3의 도전이었다(제1은 5·16혁명, 제2는 박정희 대통령 이후의 민주주의).
1월 18일 나는 노태우 대통령의 아들인 재현씨를 위원장으로 선출하는 대구 동구을(乙) 지구당 개편대회에 참석했다. 그 행사에 내가 일부러 참석한 건 당 대표가 지구당위원장에게 민자당기를 건네주는 의전(儀典)이 있기 때문이었다.
민자당의 공동 창업자로서 내가 노태우의 아들에게 당기를 직접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민자당 전당대회 이틀 뒤인 95년 2월 9일 나는 민자당 탈당 및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나는 독선과 독단, 충격에 의한 정치행태 등 대통령제가 지니고 있는 위험성을 지난 2년간 다시 한번 역력히 경험했습니다. 이를 근원적으로 시정하기 위해, 의원내각제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탈당 결심의 바탕이자 ‘가야 할 몇 마일’의 목표 지점은 바로 내각제였다. 내각책임제는 내가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전두환 정권을 바라보고 노태우·김영삼의 통치를 곁에서 체험하면서 내린 내 50년 정치인생의 결론이다. 모든 권력을 빨아들이는 대통령중심제에서 인간성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대통령은 존재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된 사람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며 오만과 독단에 빠지기 십상이다. 더구나 87년 체제라는 5년 단임제는 현직 대통령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배제된 대통령 무(無)책임제다.
임기 5년에 머물다 보니 장기적 계획을 세워 국가의 미래발전을 도모하기도 힘들다. 우리나라 대통령제가 안고 있는 이런 하자(瑕疵) 때문에 역대 대통령들은 대부분 임기가 중단되거나 당에서 쫓겨나거나 임기 후 불행한 상황에 처했다. 이제 한국은 정당과 정치가 일체가 돼 국민 앞에 책임질 수 있을 만큼 됐고 민도(民度)도 선진 수준으로 높아졌다. 의회민주주의의 꽃인 내각책임제를 채택해 지금처럼 오도가도 못하는 한국형 교착 정치를 돌파해야 한다.
나는 93년 우리 현대사를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정치로 해석한 적이 있다. 그때는 이승만·박정희[起]→전두환·노태우[承]→김영삼[轉]에 이어 결(結)의 대통령이 나올 것을 염원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기승전결을 좀 더 스케일 크게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즉 이승만·박정희[起]→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承]→내각제 총리[轉]→통일시대[結]이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제에 가로막혀 국가적 전환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애쓰고 움직여도 꽉 막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시점에 있다. 이 전환기에서 선택할 정치체제는 의원내각제라고 믿는다.
● 인물 소사전 최형우(崔炯宇·80)=김영삼(YS) 대통령의 정치세력인 민주계 혹은 상도동계의 핵심 인물. 울산 출생으로 동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71년 신민당 소속으로 8대 국회에 진입하는 등 6선 의원을 지냈다. 80년 신군부 집권 때 보안사 고문의 피해자로 YS의 민주산악회·민추협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아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90년 3당합당 뒤 정무장관을 지냈고 93년 YS집권 후엔 민자당 사무총장, 내무부 장관을 지내며 의원 재산 공개, 행정구역 개편을 주도했다. 97년 대선에서 신한국당(민자당 후신)의 주요 후보감으로 거론됐으나 3월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뜻을 접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