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0.14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2월 취임하면서부터 “정통성 있는 문민(文民)정부”라는 표현을 훈장처럼 내세웠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역사적 정통성을 이어받은 최초의 정부”라는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을 임시정부의 적통(嫡統)을 잇는 지도자라고 스스로 규정했다. 동시에 제1공화국부터 노태우 정권까지를 부끄럽고 청산해야 할 역사로 치부해 버렸다. YS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이나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업적은 안중에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두 사람은 그저 독재자에 불과했다.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역사엔 비약과 생략이 없는 법이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토막 날 수 없고 토막 나서도 안 된다. 기복(起伏)과 곡절(曲折)이 있다 하더라도 면면히 이어 흘러가야 한다. 내가 보기에 대통령 YS의 역사문제에 대한 인식은 제한적이고 독선적이었다.
93년 5월 16일 서울 르네상스호텔에서 ‘5·16 민족상’ 시상식이 열렸다. 그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나는 이날 식사(式辭)에서 평소 나의 역사관을 펼쳤다.
“우리 역사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나라를 일으킨 대표적인 분이고[起]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은 잘 나왔건 못 나왔건 그 계승자로 존재하고 오늘의 토양을 만들었습니다[承]. 그 토양 위에 김영삼 대통령이 전환기에 개혁과 변화의 선두에 서서 내일을 선도하는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轉]. 이제 매듭을 짓는 사람이 나오면 다음을 이어받아 이 시대가 매듭지어질 것입니다[結].” 이어 “누가 뭐라 해도 5·16은 역사로서 존재하고 오늘의 토양을 만드는 데 우리 민족사에 용해해 들어가 있습니다”고 덧붙였다.
언론은 나의 발언을 ‘역사의 기승전결론(起承轉結論)’이라고 주요 뉴스로 보도했다. 이를 계기로 5·16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정계의 이슈로 떠올랐다.
나는 대통령과 매주 한 차례 배석자 없이 단독으로 만났는데, 6월 4일 오후 YS와 청와대에서 주례회동을 했다. 그 자리에선 나도 YS도 5·16 발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당사로 돌아오니 강재섭 대변인이 “기자들이 5·16 관련 사항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요”라고 했다. 나는 “기자들에게 이걸 보여주라”면서 쪽지를 건넸다. ‘소이부답’이라고 쓴 메모지였다.
YS는 ‘역사의 후퇴’를 말했지만 역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뒤로 가지 않고 앞으로 전개되는 법이다. 어제는 어제의 논리로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오늘이 이뤄진 것이다. 어제는 오늘의 어머니,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있는 것이다. 역사의 평가는 역사가에게 맡겨둬야 한다. 정치인이 역사를 단죄(斷罪)하려 들면 역사를 오도(誤導)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대통령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얼마 지나지 않아 YS의 역사관에 또 한 번 실망하는 중대 발표가 나왔다. 93년 8월 9일 김 대통령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다”고 발표했다. 일제시대의 어두움은 청산해야겠지만 그곳은 광복 이후 현대사의 산실이었던 만큼 정치 이벤트가 아닌 역사의 긴 안목으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가 기초설계한 조선총독부는 10년의 공사를 거쳐 1926년 완공됐다.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웅장한 석조 건물이었다. 일본에도 이런 수준의 건축물은 없었다. 나는 보통학교 1학년이었던 32년 서울로 수학여행을 왔을 때 처음 이 건물에 발을 디뎠다. 2층을 두리번거리던 내게 수위가 “저쪽 검은 문이 총독 각하 방”이라고 설명하자 무서워 소름이 끼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중에 내가 총리가 돼 그 방에 근무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해방 뒤 이 건물은 미 군정청 하지 중장 집무실로 쓰였고 48년 5월 제헌국회가 이곳에서 역사적인 개원을 했다. 48년 7월 24일 청사 현관에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리기도 했다. 정부 수립 뒤 38년간은 정부 중앙청으로 기능했다. 60년 정군(整軍)운동을 주도하던 내가 중령 신분으로 장면 총리를 직접 만나겠다며 찾아왔던 곳이다. 71년 내가 총리로 임명돼 4년 반 동안 일했던 곳도 이 중앙청 건물이었다. 구 총독부 건물은 일제 총독이 살았던 기간보다 이승만 정권 이래 우리 정부가 중앙청으로 쓴 기간이 더 길었다.
86년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바뀌어 관람객들이 찾고 있었다. 이 건물을 김영삼 대통령은 소위 ‘민족정기 복원사업’이란 명분을 내세워 완전히 부수겠다고 했다. 그는 내친김에 93년 10월 청와대 구 본관의 철거를 지시했다. 일제시대 총독관저였고 경무대로 불렀던 이 건물은 제2공화국 이후 청와대로 불리면서 건국 이후 역대 대통령(이승만~노태우 집권 전반)이 집무실과 관저로 써온 역사의 유물이었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두고는 찬반 논쟁이 뜨거웠다. “일제의 잔재”라며 YS의 철거 결정에 찬성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구 총독부를 허물어 흔적까지 없앨 이유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역사란 영광과 오욕을 함께 엮어간다. 치욕의 역사도 역사다. 후세에게 가르쳐야 할 교훈이다. 역사의 영광은 나누고 치욕은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바로 후세가 발휘해야 할 지혜다. 부끄럽다고 해서 지워 버린다고 그 역사가 생략되지 않는다. 인도 델리에 갔을 때 도시 한복판에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동상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다. 인도인이라고 해서 식민지배자였던 빅토리아 여왕을 존경해 남겨두진 않았을 터다. 그들은 역사의 한 토막을 존중한 것이다.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수도였던 중국 창춘(長春)은 지금도 그 시대 건물을 쓰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면서도 만주국 시절의 여러 청사를 의과대학 건물, 심지어 공산당 당사로 쓰는 실용주의적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 있는 구 대만총독부 청사는 지금도 대만 총통의 집무실로 쓰인다. 괴로웠든 슬펐든 역사는 흐릴 수도 지울 수도 없다. 나는 총독부 건물의 해체에 원칙적으로는 찬성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가린 건물 설계는 우리의 민족정기를 없애려는 일제의 간계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신생 대한민국의 역사에 편입된 중앙청의 두 가지 상징 부분은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옮겨 보존·전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철거 계획이 발표된 뒤 나는 YS와의 청와대 주례회동에서 작심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의 중앙홀은 48년 출범한 제헌국회 의사당으로 쓰인 역사적 장소입니다. 그 중앙홀만은 부수지 말고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시지요. 제헌국회가 탄생한 장소는 대한민국 독립의 명맥을 잇는 역사물이지 않습니까.” 내 말에 YS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다 없애 버리자고 이미 결정했는데 왜 토를 다느냐’라는 생각인 듯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국립중앙박물관 앞 국기게양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됐을 때 가장 처음 태극기를 올린 게양대입니다. 또 6·25 사변으로 부산까지 피란을 갔던 우리 군이 석 달 만에 서울을 수복하고 태극기를 올린 바로 그곳이기도 합니다. 이 국기게양대도 함께 독립기념관으로 옮겨 남겨 놓으시죠.” YS는 내 말에 “씰~데없는 소리 마십시오”라며 거절했다. YS는 내가 반대 목소리를 낼 때마다 ‘씰데없는 소리’라며 묵살하곤 했다. 그의 습관적인 사투리 말투겠지만 나로선 어이없고 당황스러웠다.
결국 95년 8월 15일 지붕 위 첨탑 철거를 시작으로 구 총독부 건물은 해체돼 돌가루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제헌국회와 제2대 국회의 의사당으로 쓰인 중앙홀도, 9·28 서울 수복의 감격이 담긴 국기게양대도 모두 철거됐다. 2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봐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 소사전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건물=일제가 1926년 경복궁 내 근정전 앞뜰에 연건평 1만여 평(약 3만3000㎡) 규모로 지은 5층 석조 건물. 해방 뒤 미 군정청이 쓰면서 ‘캐피탈홀(capital hall)’이라 불렸고 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를 번역해 중앙청으로 이름 지었다. 6·25 전란 때 일부 파괴됐고 5·16 직후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다. 83년 과천정부청사 시대가 열릴 때까지 한국 행정의 중심이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조돼 쓰이다가 1995~96년 완전 해체·철거됐다. 잘려진 첨탑과 일부 부자재만이 독립기념관 야외의 ‘조선총독부 철거부재(部材) 전시공원’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