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0.09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91> 1노 2김 내각제 합의 각서
정치하는 사람들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최고로 치고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추구해야 한다. 그게 국가 운영의 원칙이며 내가 3당 합당의 결행을 한 것도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김영삼(YS)과 나는 “당파적 이해(利害)로 분열·대결하는 정치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선언하고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당파적 분열은 쉽게 해소될 사안이 아니었다. 한 지붕 세 가족이란 말이 실감될 정도로 서로 의심하고 견제했다. YS의 민주계(통일민주당)는 이질적으로 자리했다. 우리(신민주공화계)와 민정계(노태우 대통령계)가 산업화 세력을 대표했다면 민주계는 민주화 세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YS는 차기 대권 문제로 DJ와 갈라섰지만 민주계 의원들은 야성(野性)의 정치를 해온 이력과 체질 면에서 오히려 평민당(평화민주당) 쪽과 가까웠다.
첫 충돌은 민주계의 김영삼 최고위원(5월 9일 창당 전당대회 이후 대표최고위원으로 바뀜)과 민정계의 박철언 정무장관 사이에서 일어났다. 90년 3월 하순 YS가 소련을 방문할 때였다. 노 대통령은 박철언 장관한테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보내는 자신의 친서를 맡기며 YS의 방소(訪蘇)를 돕도록 했다. 그러나 박 장관은 “나는 YS를 수행(隨行)하는 것이 아니다. 동행(同行)으로 봐달라”고 주장하며 출발 때부터 잡음을 일으켰다. YS는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잠깐 만날 때 무엇이 그리 급했던지 노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한 박 장관을 데려가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를 만난 뒤엔 “다 끝났다.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과장된 표현을 사용해 외교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수행이니 동행이니 하는 말장난이나 소련 방문 중 YS와 박철언이 벌인 경쟁적 행각은 낯 뜨거운 장면이었다. 귀국 뒤 YS는 노 대통령에게 박 장관의 경질을 요구하며 당사 출근을 거부했다. 박철언은 “내가 3당 합당 과정이나 방소 기간 중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 YS의 정치생명은 하루아침에 끝난다. YS는 내가 크는 걸 밟아버리겠다는 것 같은데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고 반응했다. 박철언은 이 발언을 한 뒤 사흘 만에 경질됐다.
박철언은 처음부터 김영삼의 상대가 아니었다. 박철언은 YS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9단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착각이었다. 박철언은 말하자면 한정된 목표를 타격하고 기지(基地)로 되돌아와야 하는 노 대통령의 유격대장일 뿐이었다. YS는 오직 노태우만 상대했다. 김영삼의 거센 공세가 괴로웠던 노 대통령이 ‘너 이제 당 그만 시끄럽게 해라. 그만두라’며 박철언을 정리했다. 나는 그때 김영삼 편을 들었다. 합당의 주체가 노 대통령과 YS, 나인 만큼 이 질서가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 박철언이 정무장관을 그만둔 뒤 내각제 추진 문제는 일단 노 대통령이 직접 관리했다.
90년 5월 9일 서울 올림픽경기장. 3당 합당의 마지막 공식 절차인 민자당 창당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 발표된 당 강령 제1항은 ‘민자당은 의회와 내각이 함께 국민에게 책임지는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한다’는 것이었다. 문장의 뉘앙스가 의원내각제 권력 구조를 연상케 하는 문구로 다듬어졌다. 나는 대회가 끝난 뒤 기자들에게 “민자당 강령 1항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빙산은 조금 드러나 있기에 위엄이 있다”고 말했다. 들을 귀 있는 사람, 알 만한 사람만 알아들으라는 소리였다. 빙산은 무엇인가. 바닷속에 대부분의 실체가 감춰져 있는 무서운 거대한 덩어리다. 눈 밝은 사람은 일각을 보고 빙산의 전체를 헤아릴 수 있을 터였다. 그 속뜻을 눈치챈 언론이 있었고 그로부터 커다란 내각제 각서 파동이 이어졌다.
전당대회 사흘 전인 5월 6일 이런 일이 있었다. 청구동 집으로 박준병 민정당 사무총장이 우리 당(신민주공화당) 김용환 정책위의장과 함께 찾아왔다. 그는 이른바 ‘내각제 합의각서’를 가져와 나의 사인을 요청했다. 각서를 보니 맨 밑에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란 활자가 세 줄로 나란히 인쇄됐고 ‘김영삼’이란 글자의 오른쪽 옆에 ‘영삼’이라고 비스듬히 자필 서명이 적혀 있었다. 박 총장은 “조금 전 상도동 자택에서 김영삼 총재를 만나 사인을 받아 오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반갑게 서명을 하며 “수고했다. 그러나 내각제의 길이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YS의 약속 이행 의지와 노 대통령의 개헌 결행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YS와 내가 차례로 서명한 문서는 그날 저녁 다시 청와대로 보내졌다. 그 후 노 대통령의 친필 서명이 추가된 사본이 나한테 전달됐다.
세 사람이 자필 서명으로 확인한 각서 내용은 ‘①의회와 내각이 함께 국민에게 책임지는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한다 ②1년 이내에 의원내각제로 개헌한다 ③이를 위하여 금년 중 개헌작업에 착수한다’였다. 이 3개 항 중에 내각제 정신을 담은 첫째 항만 당 강령에 공개했으니 이게 빙산의 일각이었다. 빙산의 덩어리는 개헌 완료 시점(91년 5월)과 시작 시점(90년 중)을 적시한 추진 일정인데 이건 물밑에 가라앉혀 놓았다.
내각제 추진 일정을 공개하지 않은 건 김영삼 대표의 거부감 때문이었다. 내각제는 개헌을 결행하려는 노태우 대통령의 의지와 약속을 묵살하려는 김 대표의 의지가 충돌하는 영역이었다. 의지의 대결에서 노 대통령이 지고 YS가 이김으로써 의원내각제는 불발됐다. 나는 내각제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염원이 있었지만 북방외교와 보수대연합의 대의(大義)를 중시했다. 그러자면 노 대통령의 선택과 결심을 따라야 했다.
YS는 내각제 합의에 관한 한 서명한 사실은 외면한 채 부인(否認)과 둘러대기로 일관했다. YS는 전당대회 20여 일 뒤인 5월 29일 합의각서 3개 항이 중앙일보에 보도되자 “내각제 당론을 정한 바 없다. 합의각서는 있을 수 없다”고 막무가내로 진실을 묵살했다. 그때 그 기사는 합의각서의 실물 사진이 없고 민정계와 공화계 모두 사실 여부를 확인해 주지 않아 파장은 길지 않았다. 더구나 노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의 소련과 국교를 맺는 북방외교의 절정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어서 최초의 내각제 각서 파동은 잠재워졌다. 하지만 다섯 달 뒤인 10월 25일 합의각서의 사진이 같은 신문에 나면서 그것은 우리 3인의 내각제 추진 서명의 완성된 증거물로 파문을 일으켰다. YS는 그 상황을 유출 논쟁으로 바꾸면서 수세를 역전시키려 했다. 그는 “내각제 합의문이 유출된 진상을 공개하라. 내각제 약속이 국민 위에 있을 수 없다”고 국민을 내세워 초점을 바꿔 버렸다. YS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이 발휘된 것이다. 그는 당무를 거부하고 고향 마산에 내려가면서 “노 대통령이 무리한 개헌으로 역대 정권처럼 불행한 일을 당해선 안 된다”고 자극적인 발언을 했다.
나는 김영삼 대표를 당의 2인자이자 순리상 차기 지도자라고 존중해 왔으나 당 총재인 대통령을 대하는 그의 직설적이고 도발적인 언행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가출한 자리를 대행하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 일에는 순리가 있다. 우리는 나이가 이순(耳順)이 넘었다. 천지 이치를 알고 따를 나이다. YS에게 친구이자 정치 동지로서 부탁한다. 이치에 맞게 순리에 따라 감정을 빼고 행동하라.”
노 대통령은 김 대표의 사생결단식 기세(氣勢)를 당해내지 못했다. 김윤환 원내총무를 마산에 보내 내각제 추진을 포기하겠다고 손을 들어버렸다. 김영삼의 배수진 정치, 뒤집기와 여론몰이 정치에 밀려 열흘 만에 대통령은 “내각제는 국민이 원치 않는 상황이기에 추진할 수 없다. 더 이상 이 문제로 당내 불협화음이 없도록 하라”고 말했다(90년 11월 9일). 3당 합당의 주요 목표였던 내각제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노 대통령은 겉으로는 내각제에 대한 의지가 강한 듯 보였지만 속까지 꽉 들어차게 신념이 박힌 건 아니었다. 개헌은 2단계(국회의석 3분의 2 찬성+국민투표 과반수 찬성)를 거쳐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정이다. 더구나 내 손으로 뽑는 직선제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강한 데다 내각제는 노 대통령의 퇴임 후 안전장치라는 의심이 곁들여져 있었다. 그렇다 해도 노 대통령이 직을 걸고 꼭 하려고만 들었다면 내각제는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3당 합당으로 민자당 의석이 국회의 3분의 2를 넘은 상태라는 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였던 것이다. 내각책임제는 타협과 합의의 정치를 가능케 하는 제도다. 대통령중심제는 집권자의 탐욕을 자극하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촉발한다.
노 대통령은 “내각제 개헌은 전두환 시대 때 대통령이 휘두르는 권력을 보면서 마음에 품게 됐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정치 금언(金言)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두고 한 말이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연임을 허용하지 않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5년 단임제여서 집권자가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서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가 적다. 우리나라가 전환적 시기를 맞아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려면 의원내각제를 도입해야 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확신을 갖고 이런 사정을 사심 없이 국민에게 호소했다면, 또 YS와의 내각제 합의 내용을 공개하면서 정면으로 대처했다면 김영삼 대표는 감히 탈당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통치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의 의지가 허물어지면서 내각제 추진의 원동력은 온데간데없이 흩어졌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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