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0.05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89> 3당 합당 전야
1990년대를 목전에 둔 89년 초 나는 단념할 것과 집중할 것을 가려내기 위한 고민이 깊었다. 88년 4·26 총선은 여소야대(與小野大)의 4당체제를 출범시켰다. 이는 대화와 타협, 견제와 균형으로 국정을 이끌고 민주화를 실현하라는 국민의 뜻이었다. 하지만 그 한계점은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나를 비롯한 정당 지도자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주의와 분파주의로 정치는 혼선과 낭비에 휩싸였다. 정쟁과 선명성 대결로 국민은 정치를 멀리했고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은 집권당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집권당의 전략 부재로 대법원장 임명 동의에 실패하면서 민정당과 정부는 무력감에 빠졌다. 오죽하면 노 대통령을 가리켜 ‘물태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정치가 삐걱거리고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 사회도 불안했다. 대학생들의 시위는 연일 계속 됐고 기업은 노사분규로 몸살을 앓았다. 치안 부재와 물가고로 국민의 불안과 한숨이 늘어갔다. 나는 제4당의 총재로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했지만 국리민복을 위한 정치의 임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과 무력감을 느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인식 속에 전환과 돌파구를 마련코자 했다.
국제적으로는 대변혁기였다. 소련 고르바초프 당서기장이 ‘페레스트로이카’(총체적 개혁)를 제창하면서 동유럽 공산권 곳곳에서 개혁·개방의 바람이 몰아쳤다.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은 명확했다. 소련·동유럽·중국 등 그동안 막혀 있던 북방(北方) 대륙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27년 전인 62년 나는 ‘매국노’ 소리 듣기를 각오하고 오히라 일본 외상을 만나 대일청구권 자금을 담판 지었다. 그때는 북쪽으로 소련과 중국에 가로막힌 우리나라가 살아남으려면 일본을 딛고 태평양·인도양·지중해·대서양으로 뻗어나가야만 했다. 이제 수십 년간 막혀 있던 서북방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대륙으로 내달려갈 기회였다. 다가올 통일시대를 위한 기반을 닦기 위해서도 북방정책은 중요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출범 초부터 북방정책 추진을 떠들썩하게 홍보했다. 하지만 여소야대 정국을 관리할 수 있는 의지와 전략이 부족한 노태우 정권이 북방외교를 성공시킬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나는 우리 당이 아닌 나라를 위한 길이 무엇일지를 생각했다. 내 결론은 북방외교를 위해서라도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89년 3월 7일 나는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과 다시 만났다. 배석자 없이 단 둘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세 시간 가까이 회담했다. 나는 노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를 중지할 것을 제안하는 한편으로 이렇게 말했다. “북방정책을 포함한 여러 국정과제를 추진하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여소야대 정국으로는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북방외교는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하기가 힘듭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중대한 문제입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노 대통령은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한 표정으로 내 말에 귀 기울였다. 나는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을 꺼냈다. “공화당 35명이 민정당과 합치면 여소야대가 여대야소(與大野小)로 바뀝니다. 대통령이 하고자 하는 북방외교를 포함한 국방·외교 정책을 소신껏 할 수 있습니다. 공화당과 합칩시다. 그것이 나라를 위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결심입니다.”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의 합당(合黨)을 처음으로 제안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정치권의 거대하고 충격적인 변화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깜짝 놀라면서도 반색했다. 그는 내 손을 붙잡더니 “좋습니다. 곧 합시다”라고 말했다. 서로 뜻이 잘 통했다. 청와대 회담을 마치고 국회 총재실로 돌아와 김용환 정책위의장을 따로 불렀다. 그에게 “우리 합치기로 했다”고 합당 추진 사실을 처음 알렸다. 노 대통령이 실무대표로 정한 홍성철 청와대 비서실장과 합당을 위한 실무협의를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89년 7월 10일 노 대통령과 오찬회동에서 양당 통합의 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회담을 마친 뒤 나는 기자들에게 “합리적으로 대동단결할 시기가 오고 있으며 필요한 조치를 서서히 취해나가자고 했다”고 회담 내용을 설명했다. 정치권이 정계개편설로 술렁거렸다. 민정당 내 일부 세력은 “공화당과의 합당은 안 된다”면서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나섰다.
노 대통령이 결단을 계속 미루고 있던 89년 10월 나는 김영삼 민주당 총재와 연이어 골프회동을 했다. 10월 2일엔 안양컨트리클럽에서, 10월 31일엔 관악골프장에서 함께 골프를 쳤다. 두 번 모두 27홀을 돌면서 YS와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헛스윙한 YS가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에 우리 둘이 파안대소하는 사진이 그때 분위기를 드러내준다. 두 번째 회동에서 우리는 “민주화가 이뤄질 때까지 두 총재가 우정과 소신을 가지고 협력해 나가기로 한다”는 내용의 합의문을 발표했다. 정가에서는 나와 YS의 ‘우정과 소신’의 관계에 주목했다. 양당의 합당설까지 나왔다. 그때 ‘골프장에서 정치9단인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에 대한 추측이 많았는데 사실 별 의미 있는 내용은 없었다. 합당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나도 YS도 민정당과 합당을 추진 중이란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만 우리 둘의 잦은 회동이 노 대통령에겐 자극이 됐을 것이다.
90년 새해가 밝았다. 연초부터 정계개편설이 무성했다. 그 직전 연말에 박준규 민정당 대표가 “새로운 양당체제로 정계를 개편하고 그 과정에서 민정당을 해체할 수 있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면서 정치권은 소동이 벌어졌다. 당시는 5공청산 문제가 주된 의제였던 터라 이런 정계개편은 민정당 의원들도 예상 못한 돌출적인 것이었다. 박준규 대표는 발언 파문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청와대에서 영수회담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노 대통령은 DJ(1월 11일), YS(12일)에 이어 13일 나와 만났다. 이날 회담을 기점으로 민정당과 공화당 합당을 위한 작업은 급물살을 탔다. 20일 신라호텔에서 김용환 정책위의장과 박준병 민정당 사무총장이 합당을 위한 합의각서를 작성했다. ‘민주정의당과 신민주공화당은 구국 일념으로 조건 없이 당 대 당 합당한다. 새로 합당되는 당 명칭은 민주자유당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실무작업은 끝났고 1월 22일 청와대 회담만 남았다. 그 즈음 나는 바둑을 두며 기자들에게 “진천동지(震天動地)할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경천동지(驚天動地)보다 더 큰일이 진천동지다. 경천은 하늘을 놀라게 하는 것이지만 진천은 하늘을 흔드는 일이다. 한국 정치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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