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9.30
[김종필의 '소이부답'] <87> JP와 세계 정상들의 리더십
JP “공산주의는 싫지만 호찌민 존경”…철권통치자 프랑코 "나도 동감”
수만 명 군중과 라 마르세예즈 합창
드골은 프랑스 영광 재현한 지도자
알몸으로 루스벨트와 대면한 처칠
“각하 보십시오, 전 숨길 게 없습니다”
특유의 유머로 미국 전함 지원 얻어
풍운아(風雲兒). 내 이름 앞에 자주 붙는 수식어 중 하나다. 이 말이 따라붙기 시작한 건 내가 1960년대 전반 1, 2차 외유(外遊)를 겪고 나서부터다. 5·16 혁명으로 세상을 뒤집었고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의 창당 산파역을 맡았지만 나는 적지 않은 수난을 겪어야 했다. 두 번의 외유는 ‘자의반 타의반(自意半 他意半)’이었다. 고국에서 내쫓긴 듯한 설움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 시절 해외 체류의 경험은 나를 키운 자양분이 됐다. 자유롭게 유럽과 미주 각국을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배웠다. 각국의 선진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또 그 나라 지도자의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확인한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63년 여름을 나는 프랑스에서 보냈다. 공화당 창당을 둘러싼 갈등으로 1차 외유를 떠났을 때다. 프랑스의 전쟁 영웅 샤를 드골이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었다. 나는 드골의 연설을 현장에서 듣기 위해 그가 찾아가는 프랑스 지방 곳곳을 따라다녔다. 그때 들었던 연설의 마지막 대목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단상에서 드골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에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있다. 잔 다르크가 있다. 빅토르 위고가 있다. 우리가 나가는 데 방해란 있을 수 없다. 일찍이 프랑스의 영광 없이 유럽의 영광은 없었다. 유럽의 영광이 있었다면 프랑스의 영광에서 시작한 것이다.” 이어 드골이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선창했다.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 대혁명 때 구체제와 싸우는 자유 시민들의 노래였다. ‘가자, 이 땅의 아들딸들아, 영광의 날이 왔도다’로 시작해 ‘나가자! 나가자! 더러운 피가 우리의 밭고랑을 적시도록’이라는 후렴구가 반복되면서 격정과 단결을 불러일으킨다. 드골을 따라 수만 군중이 일제히 이를 합창했다. 고집스러운 애국심으로 가득 찬 그의 연설은 프랑스 국민이 아닌 내 가슴까지 뛰게 만들었다. 대단한 연설가이자 선동가였다. 국민과 고락(苦樂)을 같이하는 지도자가 가진 힘이었다.
나는 존경하는 해외 인물로 드골과 함께 윈스턴 처칠을 꼽는다. 처칠은 모험성과 지적 욕구, 불굴의 투지, 자유성과 독재성 같은 모순된 성격이 뒤섞인 독특하면서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중에서도 그의 가장 큰 매력은 결단의 리더십이다. 내일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리는 처칠 특유의 결단력이 아니었다면 영국은 전쟁의 위기를 그렇게 효과적으로 극복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1차 외유 중 영국에 며칠 머물면서 런던 시내 중심가에 있는 처칠의 워룸(war room)을 찾아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처칠 총리와 그 내각이 전쟁을 지휘했던 지하 벙커다. 처칠이 3년 동안 지냈던 좁고 답답한 방을 들여다보며 그의 흔적을 확인해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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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의 유명한 일화가 떠오른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인 41년 12월 성탄절 즈음 처칠은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다. 영국 총리로서 처음으로 미 상하 양원 합동연설(41년 12월 26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처칠에 대해 고집쟁이 독불장군이라는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처칠이 국회에서 무슨 말을 할지가 걱정스러웠던 루스벨트는 처칠이 머물던 백악관 내빈용 침실로 찾아갔다. 그가 방문을 열었을 때 마침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처칠이 벌거벗은 채로 그와 마주쳤다. 당황한 루스벨트가 대단히 실례했다면서 나가려고 하자 처칠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미합중국 대통령 각하, 영국 총리 처칠은 각하에게 숨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자, 보십시오.” 그 한마디로 처칠은 루스벨트의 마음을 사로잡아 미 전함 30척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이후 두 리더의 결속은 전쟁 승리로 귀결됐다.
나는 공화당 의장이었던 66년 10월 미국 미주리주 풀턴시 웨스트민스터대에 초청됐다. 명예정치학박사를 받은 후 1200명의 청중 앞에서 ‘자유를 향한 아시아의 길’이란 제하로 영어 연설을 했다. 46년 3월 처칠이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드리워져 있다”는 유명한 연설을 한 바로 그 단상이었다. 처칠은 유럽을 이야기했지만 20년 뒤 나는 같은 자리에서 ‘죽의 장막(bamboo curtain)’을 지적하며 아시아를 이야기했다. 퍽 감회가 깊었다. 웨스트민스터대에는 윌리엄스 총장의 요청으로 내가 그린 ‘봉산탈춤’ 한 점을 보냈는데, 대학 전시실에 처칠과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이 그린 그림과 함께 나란히 걸려 있다.
1차 외유 8개월 동안 유럽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여행했다. 자동차로 8만㎞를 뛰었다. 독일에선 벤츠를 몰고 시속 100마일로 아우토반을 달리기도 했다. 그렇게 돌아보고 나니 눈이 훤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외유에서 돌아와서 내가 한 이야기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언제 한 번 나처럼 세계 일주를 하시면 시계(視界)가 확 넓어질 것이다.” 박 대통령은 5·16 이전에 미국 포트실(오클라호마주) 포병학교와 대만 쌍십절 행사에 다녀오신 것이 외국 경험의 전부였다.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뒤엔 아무리 해외를 나가도 별 소득을 얻을 수가 없다. 제한된 곳에서 제한된 사람만 만나고 돌아오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현지인을 만나고 어울려 술도 마시면서 야속(野俗)을 체험해야 세계가 넓고 깊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후로도 가끔 술자리에서 내가 외국을 다녔던 이야기를 꺼내면 박 대통령은 부러워하셨다. 그는 “임자는 자유로우니까 그렇게 막 돌아다니면서 볼 수 있지. 내가 그럴 수 있느냐”고 했다. 박 대통령이 나처럼 외국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면 생전에 더 많은 일,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64년 6월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격화되자 나는 2차 외유를 떠났다. 그해 9월 나는 미국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시에 있는 트루먼도서관에 찾아가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과 만났다. 트루먼은 50년 북한 공산군이 한국을 기습 침공하자 주저 없이 사상 초유의 유엔연합군을 편성해 싸운 용기 있는 지도자였다. 한 시간가량의 면담에서 여든의 원로 정치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재임 시절 중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그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도 한국을 통일시키지 못한 일이오. 의당히 마지막까지 싸워 한국 통일을 봤어야 했는데 국제적인 반대여론이 적지 않아서 성취를 못했소. 이젠 노령으로 내 생전에 한국 통일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큰 짐을 지고 가게 될 것 같소.”
내가 그에게 “조그만 나라의 젊은 후진에게 당부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라고 부탁하자 그는 호랑이 이야기를 꺼냈다. “사육사는 매일 쓰다듬어주고 먹여주니까 호랑이가 고마움을 갖고 있겠지 하지만 천만에. 잘못 발을 밟기라도 하면 큰 입을 벌려 물고 덤비는 게 호랑이요.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국민을 호랑이로 알고 정치를 하면 틀림없이 잘될 것이오.” 트루먼 대통령의 맑은 두 눈이 둥근 테의 안경 너머로 나를 응시했다. 그 말은 진리였다. 정치인은 그저 봉사하는 사람이다. 정치인이 반대급부를 얻어내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나와 가깝게 지낸 외국 지도자 중엔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있었다. 68년 10월 나는 정계를 떠난 야인 신분으로 스페인을 방문해 처음 프랑코와 만났다. 이후 그가 36년간 철권통치의 막을 내리고 75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세 차례 더 만남을 이어갔다. 프랑코 총통과의 대화 중에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대목이 있다. 그가 먼저 “월맹의 호찌민(胡志明)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나는 공산주의는 싫어하지만 호찌민은 존경할 만한 지도자입니다. 시종일관 꿋꿋한 의지를 가지고 싸워 프랑스를 물리치고 미국과도 강하게 맞서고 있지 않습니까.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자 프랑코 총통은 “나도 동감한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그가 호찌민을 높이 평가했음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일 것이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세계의 지도자들과 오래전 만남을 떠올리면서 나는 그들이 발휘했던 지도력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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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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