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연재] “5공 문제 풀자” JP의 편지정치…3김시대엔 여백과 함축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2015.10.02 

[김종필의 '소이부답'] <88> 여소야대 캐스팅보트를 쥐다
YS·DJ 불신의 골 … 손잡기도 꺼려
JP 야3당 영수회담 제의엔 화답
“직설·단선은 정치9단 방식 아니다”
JP, 생략?절제 언어 한자로 편지

1989년 12월 16일 새벽 1시 노태우 대통령이 야 3당 총재와 함께 밝은 표정으로 청와대 회담장을 나서고 있다. 전날 오후 6시에 시작해 7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담에서 1노3김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과 TV 중계 등 연내에 5공 청산을 마무리하기 위한 11개 항에 합의했다. 왼쪽부터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노 대통령,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총선 결과로 한국 정치는 새로운 판이 열렸다. 이른바 여소야대(與小野大), 4당 체제가 등장했다. 언론에선 1노3김(노태우·김대중·김영삼·김종필) 체제라 부르기도 했다. 집권당인 민정당은 과반의석(150석)에 크게 못 미치는 125석을 차지했다. 내가 이끈 신민주공화당은 국회 교섭단체 기준 의석(20석)을 크게 상회하는 35석을 얻었다.

87년 12월 대선에서 3등을 했던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은 70석으로,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59석)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올라섰다. 정권교체의 실패로 자책과 침체에 빠졌던 야권의 분위기는 활기를 띠었다. 야 3당이 하기에 따라선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다. 야대(野大) 상황이기에 전두환 5공 정권의 잘잘못을 가려내 청산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됐다.


　하지만 김영삼(YS)·김대중(DJ) 양김씨의 불신과 앙금은 깊었다. 두 사람은 만나서 악수를 하더라도 손을 꼭 쥐는 법이 없었다. 그냥 잡는 둥 마는 둥 손바닥을 살짝 갖다 대는 정도였다. 악수라는 게 꼭 쥐면서 스킨십을 해야 친밀감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두 사람은 그러길 싫어했다. 가까이에서 보면 찬 기운이 느껴질 만큼 냉랭했다.

1988년 5월 2일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김영삼·김대중 양김씨에게 보낼 편지를 붓으로 쓰고있다(가운데). 위는 YS, 아래는 DJ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장이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나는 싸울 땐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인간미 흐르는 정치를 하고 싶었다. 상대방은 나를 자극하는 경쟁자일 뿐 죽기 살기로 싸워 없애야 할 적은 아니다. 나는 그런 정치문화를 만들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나는 제4당의 총재지만 정상의 자리에 대한 야망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과 접촉에 부담이 작았다. 물고기의 움직이는 방향은 꼬리지느러미가 잡아가는 법이다. 여소야대 4당 체제의 흐름은 의석수가 제일 적은 신민주공화당이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구도 독주(獨走)할 수 없는 4당 체제에서 캐스팅보트를 행사했다. 당시 김재순 국회의장은 4당 구조를 ‘황금분할’이라고 불렀다.

　13대 총선 뒤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88년 5월 2일. 나는 양김씨에게 직접 붓으로 쓴 편지를 보냈다. 3김이 만나서 정국을 풀어보자는‘야(野) 3당 영수회담’ 제의였다. 전화나 사람을 보내 뜻을 전할 수도 있었지만 편지라는 것을 선택했다.

정성을 들여 한 자 한 자 직접 쓴 편지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의와 친밀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평소 쓰던 전용 메모지를 세로로 세워 붓으로 정성과 품격을 담았다. 편지는 이희일 비서실장이 두 사람에게 차례로 전달했다.

　“謹啓 總選大成을 祝賀합니다. 就日之件은 國政에 關한 野 三者會同으로 大綱 合意가 必要하다고 思料됩니다. 于先 高見을 들려주셨으면 해서 一筆 獻上합니다. 下回를 기다리겠습니다. 敬具 新民主共和黨 金鍾泌 上 5월 2일 金○○ 總裁 尊下.”

　(삼가 아룁니다. 총선에 크게 성과를 낸 것을 축하합니다. 오늘 말씀드리는 것은 국정에 관한 야 3자회동으로 대강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귀한 의견을 들려주셨으면 해서 글을 올립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올림. 5월 2일 김○○ 총재께.”)

　한자엔 생략과 절제, 시사의 미학(美學) 같은 게 있다. 직설과 단선으로 담기 어려운 완곡과 여백을 느낄 수 있다. 3김 총재를 언론에선 정치 9단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9단들의 정치방식은 좀 달라야 했다. 나는 예의와 격조를 갖춘 짧은 글월로 막힌 정국을 뚫어 보려고 했다. 편지를 보낸 지 하루 이틀 만에 DJ·YS로부터 답신이 왔다. 두 사람 모두 나처럼 전용 편지지에 손수 사인펜과 붓펜으로 정성을 들여 나의 뜻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글을 적었다.

3김 정치엔 이렇게 함축과 여운으로 난제를 풀어나가는 맛이 있었다. 과거에 보기 어려웠던 편지정치의 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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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31일 국회 5공 청문회 증언대에 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원고를 보고 있다. [중앙포토]

5월 18일 오전 여의도 국회 귀빈식당에서 야 3당 총재회담이 열렸다. 80년 ‘서울의 봄’ 이후 공식적으로 열린 8년 만의 3김 회담이었다. 회담은 주최한 내가 현안별 합의문 초안을 준비하고 이를 토대로 두 김씨가 자신들의 의견을 가감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정치적 합의는 서로가 자신의 주장을 상호 양보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이치(理致)를 집약해 내는 것이다. 이날 합의의 키워드는 5공 청산이었다. 야권은 5공 비리조사 특위,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특위 등 5개 특위를 구성하기로 했다.

　편지정치의 효과 덕분이었는지 야 3당 공조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양김씨의 생각과 판단이 같을 순 없었다. DJ와 YS는 야권의 선명 경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거리를 둔 채 국익과 안정을 상대적으로 중시했다. 88년 7월 2일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표결에서 그 차이가 드러났다. 대통령이 지명한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평민·민주당의 반대 당론과 공화당의 자유투표로 부결됐다. 대법원장 인준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집권 세력인 청와대와 민정당이 정국의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노 대통령은 이틀 뒤 다시 이일규 전 대법원 판사를 대법원장에 지명해 국회의 동의를 요청했다.

공화당은 대통령의 인사권을 존중하고, 사법질서의 안정을 위한다는 뜻에서 당론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연말에 강영훈 국무총리 임명동의안도 평민·민주당은 절차의 문제점 등을 들어 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총리 임명조차 대통령 뜻대로 하지 못하면 정국의 안정성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 찬성 방침을 정했다. 야 3당 공조의 기반 위에서 개별 사안에 따라 집권당에 협조하는 나의 정치방식은 두 번의 임명동의안 처리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여야 공동정치는 여소건 야소건 국민 생활에 급격하거나 이상변전(異相變轉)을 주지 않고 안정된 바탕에서 진취와 발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89년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이 일었을 때도 나는 내 목소리를 냈다. 그해 내내 문익환 목사, 임수경 여대생, 서경원 의원 등이 통일운동을 자처하며 불법으로 북한을 다녀와 구속되면서 보안법 폐지 주장이 고개를 들었다. 양김씨는 보안법을 폐지하고 필요한 부분은 형법에서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국가의 기본을 허무는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일반 사람들은 보안법이 있다고 생활에 곤란을 받거나 제한을 받을 일은 없다. 북한이 변하지 않았는데 왜 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단 말인가. 나의 강력한 반대로 보안법 개폐(改廢) 논란은 국회에서 수그러들었다.

13대 국회의 최대 과제는 5공 청산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해법은 3단계였다. 우선 전두환이 모든 것을 털어놓고 부정한 재산을 반환하며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둘째가 노태우 대통령이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셋째는 야 3당이 그 뒷수습을 화합적 차원에서 마무리하는 것이다. 원인을 만든 당사자들이 사죄하고 납득할 만한 조치를 취하면 피해자들이 용서와 해원(解寃)을 하는 수순이다.

나는 평소 5공 비리 척결과 전두환의 사과, 부정재산 환수를 요구했지만 사법처리만은 반대했다. 나는 “그의 처지가 생이불여사(生而不如死·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님)인 만큼 관용을 베풀 만하다”고 말했다. 때로는 용서하는 것이 처벌하는 것 못지않을 때가 있다. 따지고 보면 나도 전두환에게 심하게 당했다. 장학재단에 넘긴 서산목장과 제주 감귤농원을 내가 부정축재한 개인재산으로 부풀리고 둔갑시켜 나를 부패한 정치인으로 만들어 놓은 인물이 전두환이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 생각을 하면 분노가 마음 한구석에 치민다.

시간이 흐르면서 5공 청산 요구는 사회 전반으로 번져갔다. ‘전두환 체포조’를 자처하는 학생들이 서울 연희동 전두환의 집을 습격하려 하기도 했다. 전두환 부부는 서울 올림픽 뒤인 88년 11월 사과와 재산 헌납 의사를 밝히고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로 유배 아닌 유배의 길을 떠났다.

5공 청산의 절정은 89년 12월 31일 국회 청문회였다. 출석한 전두환 증인을 향해 의석에서 ‘살인마 전두환’ 소리가 들리고 명패가 증언대로 날아가는 소동으로 청문회는 난장판이 됐다. 결국 자정을 넘기면서 전두환의 답변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청문회는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나는 전두환에 대해 “스님도 아니면서 왜 절에 가 있나. 자기 집에 보내는 것이 좋다”며 그 죄는 밉지만 관용을 베풀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5공 청산 정국을 마냥 지연시키면서 거기에 국가적 에너지를 쏟고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청문회 이튿날인 90년 1월 1일 공화당 신년 단배식에서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슈베르트는 2악장으로만 된 미완성 교향곡을 만들고 길지 않은 생애를 끝냈다. 그의 미완성 교향곡은 실패하지 않았다. 전씨의 증언이 미흡한 것이 사실이나, 이제 5공 문제는 역사의 평가에 맡기고 미완(未完)의 장(章)으로 남겨놓자. 정치권은 새로운 경제도약과 정치안정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2년 가까운 5공 청산 문제를 정치적으로 종결하자는 분명한 입장 표명이었다.

나의 역사관은 공과(功過)를 엄격하고, 구분되게 평가하자는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과가 컸지만 공도 없지 않았다. 재임 중에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고, 처음으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성과를 냈다. 한국 최초로 제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대통령이라는 점에선 기록을 남겼다. 역대 한국 대통령은 혁명과 변고로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부하의 발작증적 배신으로 숨졌고, 최규하 대통령은 중간에 물러났던 것이다. 전두환은 여전히 12·12 군사반란, 5·17 정권찬탈, 5·18 광주탄압과 수천억원 부정축재의 죄가 남아 있다. 5공 청산 정국이 정리되면서 여소야대 정치는 또 한 번의 대변신을 예비하고 있었다.

● 소사전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1988년 여소야대 정국의 풍경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 사건. 88년 7월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원장 후보의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됐다.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는 공주고,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5공 때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이 됐다. 노태우 정부 출범으로 민주화 열기가 사법부로 번졌다. 소장 판사들이 사법개혁 성명을 내는 등 이른바 사법파동이 일어나자 김용철 대법원장이 사퇴했다. 이에 따라 노 대통령이 정기승 대법관을 후임으로 내정했으나 대한변협과 민변은 ‘5공의 대표적 코드 인사’ ‘판결에 외압을 받은 흔적’ 등의 이유로 반대운동을 벌였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