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0.07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90> 9시간 담판, 민자당의 탄생
나는 진작부터 노 대통령이 민주당과 접촉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같은 날 3당 동시 합당을 선언하리라는 점은 까맣게 몰랐다. 나중에 보니 김영삼(YS) 총재도 민정·민주 양당 합당으로만 알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불쾌함이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이 아니라도 어차피 닥칠 일이라면 받아들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는 ‘이것 또한 대한민국이 걸어가야 할 명운(命運)이로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밤 ‘이거 안 되겠다. 합당을 깨야겠구나’ 하는 일이 또 발생했다. 김용환 의장이 청구동 집을 찾아와 청와대의 입장이라며 내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당초에 3당은 청와대에서 내일 오전 10시에 노태우·김영삼·김종필 동시 3자회동을 하고 합당 선언을 하려고 했는데 YS가 ‘3자회동은 안 된다. 노태우·YS 양자회동을 먼저 해야 한다’고 완강히 요구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총재님은 오후 2시에 세 사람이 함께 만나자고 합니다.” 김 의장은 이를 통보해 온 박준병 민정당 사무총장에게 항의했지만 박 총장은 YS의 눈치를 보느라 “양해를 바란다”는 말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사에 양보할 일이 있고 양보해선 안 될 일이 있다. 민주당을 포함한 3당 합당은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니 받아들일 수 있지만 보수대연합이란 합당의 대의를 처음 제시한 사람으로서 합당에 선후(先後)를 나누고 내가 후발로 들어가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나는 김용환에게 “나라를 위한 구국의 결심을 제일 먼저 한 사람이 누구냐. 노 대통령이 누구를 욕보이려 하느냐. 합당을 백지화하겠다. 어제 서명한 합의 각서고 뭐고 다 때려치우라”고 말했다. 최인관 비서한테도 “지금부터 집에 청와대든 누구든 오는 전화는 받지도 마라”고 지시했다.
이런 혼선과 곡절을 겪고 22일 오전 청와대에서 세 사람이 만났다. 실무선끼리 9개 항에 이르는 합당 각서가 작성될 정도로 상당한 합의가 이뤄졌지만 세 사람이 얼굴을 맞대자 직접 풀어야 할 문제들이 적지 않게 생겨났다. 김영삼 총재는 그의 기질(氣質)대로 처음부터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는 합당 과정에서 내가 제의했던 내각책임제에 대해 “내각제는 민주당에서 반대하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오늘 합당 선언에서 내각제 일정을 명시하면 평민당과 많은 국민의 반발을 부를 것이다. 이 문제는 창당 전당대회 때까지 발표를 미뤄달라”고 요구했다. 노 대통령과 나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원래 실무자 간에 작성했던 합당 각서 제2항엔 ‘내각제 개헌을 차기 총선까지 실현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날 합당 발표에선 이를 비밀에 부치고 ‘우리나라 정치 발전에 가장 적합한 정치체제와 정치문화를 창출한다’라는 두루뭉수리 표현을 썼다.
신당의 지도체제에 대해선 YS가 엉뚱한 주장을 폈다. 그전에 합의된 내용은 공식적인 창당 전당대회까지 노태우·김영삼·김종필 세 최고위원의 합의체제로 가다가 전당대회 뒤엔 ‘노태우 총재-김영삼 대표최고위원-김종필 최고위원’의 수직적 지도체제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YS는 이 내용을 모르는 척하면서 “전당대회 뒤 총재는 내가 맡고 노 대통령은 명예총재, 김종필 총재는 최고위원을 맡는 게 좋겠다”고 했다. 해괴한 소리였다. 대통령 중심제 헌법에서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과 집권당의 총재를 맡아 국민·국회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상식이다. 의석수에서도 민정당이 민주당을 압도하는데 다수당 총재인 대통령을 명예총재로 밀어낸다는 건 헌법정신으로나 권력의 논리로나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도대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주장이었다. 노 대통령은 YS의 어이없는 말에 싱긋 웃음을 지었다. 나도 속으로 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노 대통령이 차근차근 반박했으나 YS는 ‘김영삼 총재론’을 계속 반복했다. 나는 한참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다 웃으면서 “김 총재님, 이제 그 말씀은 그 정도로 하시지요”라고 끼어들었다. YS 본인도 무리하다고 느꼈는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나는 그때 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덕담 삼아 던졌다. “다음 시대의 주연은 김영삼 총재이실 테니 나는 그렇게 알고 돕겠습니다. 저는 조연으로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겠습니다”고 했다. 민주당 의석수가 공화당보다 많으니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그게 순리라는 판단이었다. 이 말 한마디에 YS는 환하게 웃었다. 노 대통령도 “그렇게 하십시다”며 동감을 표했다. 현직 대통령 앞에서 차기 대권 얘기를 꺼내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덕담 수준에서 이 정도로 거론한 것이다.
3당 합당 협상 과정에서 노 대통령과 YS, 김대중(DJ) 평민당 총재의 권력의지와 성향이 드러났다. 노 대통령은 DJ의 참여를 요청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의 DJ에 대한 집착은 YS에 비교하면 그리 크지 않았다. 두 사람 간 색깔 차이가 컸고 노 대통령의 기반인 군부나 대구·경북 지역과 민정당에서 DJ에 대한 거부 정서가 강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총재 역시 노 대통령의 합당 제안에 명백히 거부 입장을 밝혔다. 그는 민정당 사람들이 자신에게 적대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대당 통합을 해 봤자 평민당은 껍데기 역할만 할 것이다, 거대 여당의 일원이 되어 질질 끌려다니느니 제1야당 총재의 영향력을 향유하면서 차기 대통령을 노리는 게 유리하다고 DJ는 판단했을 것이다. YS가 노 대통령의 통합 제안을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는 4당 체제 아래 대통령 선거전에서 DJ와 겨뤄 이길 자신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후보감이 마땅치 않은 민정당에 들어가 노태우의 뒤를 잇는 게 대통령이 되는 가장 근접한 길이라는 심산(心算)이었다. YS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겠다”는 말로 측근들의 의심을 잠재우고 자신을 독려했다고 한다. 합당에 임하는 자세에서 나는 YS와 달랐다. 나는 북방외교의 성공 등 국가의 내일을 염원하며 일관되게 행동하려 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한테 김윤환 의원 같은 이는 “JP 쪽 하고만 합당하면 김대중·김영삼이 손을 잡아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질 수 있으니 YS를 끌어들여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양 김씨 관계를 모르고 한 소리다. 지금도 나는 말할 수 있다. YS와 DJ는 절대로 당을 합친다거나 대선 후보를 양보할 사이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대권 집념과 경쟁의식이 그런 관계를 만들었다. 나와 노태우만의 양당 합당이었다면 나에게도 대통령이 될 기회가 오지 않았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그건 어리석은 질문이다. 역사에서 ‘이프(If)’를 끌어대면 역사가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합당에 참여한 건 북방외교를 성공시키고 보수대연합과 보혁(保革) 구도로 정치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그때 우리나라가 걸어가야 할 운명이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홍성철(1926~2004)=노태우 대통령 시대(1988~93)의 첫 대통령 비서실장. 경기고, 서울대 상대를 나온 학력과 황해도 출신이라는 지역적 중립성, 자기 인맥을 형성하지 않는다는 평판이 비서실장 발탁에 영향을 줬다. 3당 합당 과정에서 노 대통령을 대리해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접촉했다. 90년 말 노재봉 비서실장에게 후임을 넘기고 국토통일부 장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차례로 맡았다. 6·25전쟁 때 해병대 장교(대령 예편)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부대에서 통역 임무를 맡았으며 주미 참사관, 국무총리(정일권) 비서실장, 내무부 장관, 보건사회부 장관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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