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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자를 절대 넘겨다보지 말라” “의심 받을 일은 하지 말라” … JP, 노태우에게 2인자론 훈수

바람아님 2015. 10. 13. 00:57

[중앙일보] 입력 2015.09.18 


[김종필의 '소이부답'] <84> 권력자의 속성과 2인자
보안사 안가에서 만난 노태우 중장
“못할 짓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JP “그것도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


1978년 1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노태우 장군에게 소장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노 장군은 진급과 함께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임명됐다. 왼쪽부터 전두환 전임 작전차장보, 배정도 신임 행정차장보, 박 대통령, 노태우 작전차장보, 전성각 경호실 차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80년 7월 2일 오후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간 지 46일 만에 청구동 집으로 돌아왔다. 보안사의 국방색 브리사 승용차 뒷자리에 타고 집 앞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100명도 넘는 기자들이 골목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니 아내와 아들 진, 딸 예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맞아줬다. 그날부터 집 앞에는 경찰 초소가 세워져 주야 24시간 나와 가족뿐 아니라 모든 출입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골목 양쪽 끝에도 보안사 요원들이 차량을 세워놓고 잠복하고 있었다. 사실상 가택연금, 칩거생활이 시작됐다.

 8월 하순 어느 날이다.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8월 16일)하고,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전국 곳곳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전두환을 새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던 때였다. 얼마 전 중장으로 진급한 노태우 보안사령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노 장군은 79년 12·12 권력찬탈 때 경복궁 30경비단장실에 모였던 신군부 핵심 중 한 명이었다.

12·12 직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영전하더니 80년 8월 22일 전두환 후임으로 보안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내가 보안사에 감금돼 있던 5월 31일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최규하 대통령을 무력화시켰다. 이때 24명의 국보위 대책위원은 총리, 장관, 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고위 장성들이었는데 별 둘을 단 소장 출신은 노태우와 특전사령관 정호용뿐이었다. 둘 다 전두환과 육사 11기 동기생이다. 노태우가 신군부의 2인자냐 하는 설왕설래가 있던 때였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저녁 신문로 구세군회관 쪽 언덕의 보안사 안가(安家)에서 노태우를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여 사과부터 했다.

1961년 7월 반혁명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장도영 전 최고회의 의장. 뒤쪽에 노태우(대위) 당시 방첩대 내사과장이 장 중장을 법정으로 계호하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노 사령관의 말은 이랬다. “죄송합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 일이었는데… 참으로 못할 짓을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나의 보안사 구금과 합동수사본부의 일방적인 부정축재, 공직사퇴 발표에 대한 사과였다. 그렇게 용서를 구한다고 해서 원상회복이 될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솔직하고 예의 바른 어투에 내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나는 “이것도 도도히 흘러가는 시대의 역사다. 이래라저래라 해도 누구도 돌릴 수 없는 그런 흐름이 있는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이 나라를 잘 이끌어 주길 바란다”고 말해줬다. 노 사령관은 또 “선배로서 충고해주실 말씀이 없습니까”하고 물었다. 그의 말 속에 어떤 간절함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좋든 싫든 이미 권력의 길에 들어섰다. 처신을 제대로 해서 온전히 살아남아야 하는데 주변에 조언받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당신이 2인자인 듯한데, 권력을 장악한 1인자는 2인자를 소외하거나 무력화하고 싶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2인자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두 가지만 얘기해주겠다. 첫째, 절대로 1인자를 넘겨다보지 말아라. 비굴할 정도는 안 되겠지만 품격을 유지하면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이때도 2인자다운 논리가 서야 한다. 둘째, 있는 성의를 다해서 일관되게 1인자를 보좌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해라. 조금도 의심을 받을 만한 일은 하지 말아라. 때가 올 때까지 1인자를 잘 보좌해야 한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넘겨야 한다. 참는다는 것은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게 진정한 인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노 사령관은 길지 않은 내 조언에 “감사합니다. 누가 이런 얘기를 저한테 해주겠습니까. 명심하고 하신 말씀대로 잘하겠습니다”하며 거듭 고마워했다.

 노태우 사령관에게 전한 ‘2인자 이야기’는 1961년 5·16혁명 이후 박정희 대통령을 18년간 보필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들이었다. 나는 원래 혁명가의 열정을 품고 죽을 각오로 세상에 덤볐던 사람이다. 젊은 시절 내 가슴속에는 불덩어리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일본 전국(戰國)시대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가운데 ‘불꽃의 사나이’ 오다 노부나가를 좋아했다. 노부나가의 인생은 풍운(風雲)이었다. 자극적이고, 대담하며, 과단성이 있었다. 그는 무로마치(室町) 막부를 퇴장시켜 새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부하의 반역으로 수세에 몰린 끝에 할복 자결해 생을 마감한다. 나는 노부나가의 심정으로 60년 4·19 이후 정군(整軍)운동을 전개했다.
1989년 7월 10일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왼쪽)가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만나 5공 청산 등 현안에 대해 공동 보조를 취하기로 했다. [중앙포토]

5·16 혁명 뒤인 62년 중앙정보부장이던 나는 도쿄로 날아가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일본 총리와 국교 정상화 협상을 벌였다. 나는 그때 일본의 한국분단 책임론을 거침없이 얘기했다.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는 내 나이(당시 36세)를 묻고선 “메이지의 지사(志士)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지사라는 말에 흥미를 느껴 “지사 중 누구를 비유하시느냐”고 되물었더니 그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라고 답했다.

도시미치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3걸(傑)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일본 근대화 혁명인 농지·조세제도 개혁, 산업진흥책 등으로 메이지 정부의 기틀을 쌓은 인물이다. 유신의 설계자이자 혁명의 연출자였다.

 그 도시미치가 막부체제 타도에 나설 때 나이가 서른여섯이었다. 도시미치 역시 정적이 보낸 자객들의 습격에 희생됐다.

 불덩어리 같은 내 가슴속 열정은 세월이 흐르고 수많은 일을 당하면서 조금씩 순화됐다. 공화당 창당 준비 과정에서 혁명 동지들의 반발로 63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소위 1차 외유를 떠나야 했고, 이듬해에는 한일회담을 밀어붙이다 다시 ‘2차 외유’를 해야 했다. 68년에는 ‘김종필이 대권을 노린다’는 음해를 받아 모든 공직을 내려놔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자적인 권력 기반을 구축하면서부터 나에 대해 오해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모든 말과 행동을 더욱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박 대통령의 3선개헌도 처음엔 반대했지만 결국 돌아섰다. 10월 유신 때는 국내외 정세를 판단해 불가피하게 처음부터 동참했다. 박 대통령의 혁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부작용이 따르더라도 나는 그런 선택을 했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혁명가의 순치(馴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부인할 수는 없다.

 박 대통령의 18년 집권기간 중 2인자를 자처하던 적잖은 인물들이 무대 뒤로 사라졌다. 김형욱 4대 중앙정보부장,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이후락 6대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이 대표적 인물이다. 김형욱은 망명을 떠나 조국과 대통령을 비난하다 외국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부여된 권한 이상의 위세를 떨쳤던 차지철은 총탄에 맞아 불귀(不歸)의 객이 됐다. 김성곤 위원장은 71년 대통령의 뜻에 반해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 가결을 주도한 ‘10·2 항명파동’을 일으켜 은퇴했다. 그는 내각책임제 아래서 실권을 가진 국무총리가 되는 꿈을 꿨다. 이후락 부장은 박정희 대통령 몰래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해 정권을 위기에 빠뜨렸다. 2인자의 처신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80년 8월 노태우 사령관이 나의 얘기를 얼마나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는지는 알 바 없지만 그는 전두환이 집권한 7년 동안 정무장관→체육부 장관→내무부 장관→민정당 대표로 차근차근 성장했다.

 육군소장으로 정권을 뒤엎었던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열흘 뒤인 80년 8월 27일 보궐선거에서 유신헌법으로 11대 대통령에 선출되고 그 후 5공 헌법을 만들어 다시 대통령이 됐다. 전두환 시대가 87년까지 이어졌다. 그 7년여 세월 동안 나는 현실정치를 떠나 침잠(沈潛)했다. 정치활동금지법으로 80년 10월 27일 공화당은 해산됐다. 남산 공화당사를 비롯한 당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화실을 꾸려놓고 서예와 그림 그리기로 소일하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유·무형의 압력으로 박정희 대통령 추모행사조차 제대로 못 열게 했다. 나는 시간을 낚으면서 때를 기다려야 했다.

◆전·노, 공직 5개 인수인계=육사 11기 동기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평생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인수인계한 주요 공직은 5개다. 대령 시절 서종철 육군참모총장의 수석부관(1970년 1월), 장군 시절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78년 1월), 국군보안사령관(80년 8월), 민정당 총재(87년 8월), 그 다음이 대통령(88년 2월).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하는 자리이지만 전씨가 노씨를 민정당 대선후보로 지명하고 지원한 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씨 측은 노씨가 이런 배려 속에 대통령이 되고도 전씨를 백담사에 보낸 것 등에 대해 배신감을 가졌다.

● 소사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國保委)’라고 한다. 1980년 5·18 광주항쟁을 진압한 신군부가 5월 31일 만들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형식적인 의장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상임위원장을 맡았다. 내각과 계엄당국 간 협조를 긴밀히 한다는 게 명분이었지만 사실상 대통령과 행정부를 무력화하고 군부가 국정을 장악하는 최고군사회의 성격을 띠었다. 61년 5·16 때 혁명정부였던 국가재건최고위원회를 본떴다. 5공 헌법이 확정된 10월 23일 국보위는 입법 기능을 흡수해 국가보위입법회의로 개편됐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