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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는 시대의 씁쓸한 민낯 '꼰대'

바람아님 2015. 11. 30. 08:30

 시티라이프 2015-11-18

 

21세기 들어 한국에서 떠도는 가장 처참한 단어는 ‘꼰대’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주로 50대 이상, 막무가내식 언행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그들 또한 사회에서 버림받은 피해자들이다. 젊은 시절,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린 게 죄일까? 성찰하고 학습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세상은 이제 와서 ‘알아서 늙어가라’ 손짓한다. 그 열패감과 배신감이 꼰대를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필요한 때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꼰대가 자랑스러운 훈장도 아니다. 당신이 꼰대라면 당장 벗어날 길을 찾으시라. 당신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식 세대의 행복을 위해.

 

 

 

꼰대는 어디에서 온 말인가?사전에서는 선생님과 아버지를 비꼬는 표현 정도로 정리해 두었다. 어원을 ‘꼰데기’(번데기의 다른 말)로 보는 것이 대세다. 쭈글쭈글해진 세대라는 말이다. 피부도 쭈글쭈글, 사고도 쭈글쭈글하다. 당연히 나이도 포함된다. ‘남자가 마흔이 되면 자기 습관과 재혼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늙어가면 그는 습관의 포로가 되어 한발짝도 미래로 나가지 못하는 고집불통 영감이 될 수밖에 없다. ‘꼰대’가 ‘Comte’(백작) 발음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과 그에 동조했던 주요 세력들에게 일본 총독이 ‘백작, 공작’ 등 작위를 수여, 귀족의 신분을 유지하게 해주었는데, 백작의 영어식 표현인 ‘Comte [k:nt]’가 ‘꼰대’로 변화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이 하사한 귀족이 되었으니 백성들은 ‘백작은 개뿔’이라며 비웃었던 게 당연했고, 그것이 꼰대로 고착되었다는 주장이다.

 

 

꼰대가 왜 문제인가
꼰대의 어원에서 볼 수 있듯, 꼰대는 세계관이 ‘자신의 습관’에 머무는 결정적 특징이 있다. 혼자 그렇게 살면 그나마 다행인데 사회적 지위나 나이를 이용해 그 옹졸한 습관을 마치 진리인양 타인에게 강요하는 게 문제다. 후배들이 제대로 소화하면 모를까, ‘아, 그런가 보다’라고 받아들일 경우 상황은 심각해진다. 습관에 함몰되어 그것을 진리로 믿는 꼰대들은 더 이상 공부하지 않는다. 책 한 권 읽지 않고 상상의 집합체인 영화 한 편 보지 않는다. 대신 골프나 등산, 낚시, 해외여행에 집착하고 그렇지 않은 시간에는 음주 잡설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탐구’보다 ‘탐닉’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강박 때문이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을 뿐 인생이 무엇인지, 미래엔 어떤 세상이 전개될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앞으로 남은 생은 즐기다 가겠다는 절망의 말로다. 물론 그것을 나쁜 생각이라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늙어갈수록 즐길 수 있는 게 몰려다니며 세대 파워를 과시하거나 음주, 노래방에 가는 게 전부가 되선 안된다. 창창했던 시절 습득했던 귀한 지식과 경험을 세상에 기부하고 나누는 일로 기쁨을 찾는 장노년 세대도 많이 있다. ‘먹고 살기 바쁘다’는 비루한 구실로 성찰하지 않고 살아온 20~30년의 세월이 한때 총명했던 열혈청년을 꼴통 할배로 늙어가게 만든 것이다. 본인은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꼰대는 다 나쁜가?프레드릭 배크만이 쓴 소설 <오베라는 남자>를 읽어보면 ‘습관에 갇혀 사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베는 일생에 오로지 한 여자만 사랑했고 그녀가 죽자 자신도 죽기로 결심했으며, 젊은 시절 구축해놓았던 마을의 질서가 무너지는 꼴을 보지 못해 허구한 날 이주민, 청년들과 갈등하며 살아간다. 스웨덴 차(소설은 스웨덴을 배경으로 한다) ‘사브’를 몰다 수입차 BMW로 바꾼 친구를 경멸했고, 자동차 주차는 물론 자전거 주차 원칙을 위반하는 사람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풍화는 조금씩 진행되고 오베 또한 그 현실을 인정, 조금씩 양보하며 살아간다. 소설은 고집스러운 장년 오베를 통해 기존의 질서와 새로운 세계관 사이의 중력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해주고 있다. 오베가 새로운 세대, 이주민에게 강력한 ‘견제’가 될 수 있는 근거는 그가 ‘마을의 개념’과 장점을 정확히 알며, 그것이 무너졌을 때 닥칠 재앙을 예견할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오베는 결코 꼰대가 아닌 보수의 가치를 알고 있는 중늙은이일 뿐이다. 꼰대가 자기 세계에 빠져있지 않고 하다 못해 마을까지만 세계관을 넓혀도 세상의 변화는 보다 유연하고 안정적으로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꼰대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습관을 움켜쥐고 강요하며 산다. 그래서 꼰대는 다 나쁘다.

 

 

2030세대가 말하는 꼰대 경험기

▶윽박지르기 선수, 울 아버지 | 21세 A씨, 공익근무 중

우리 아버지는 꼰대다. 고1 때 아버지에게 ‘테니스 배워서 체육대에 가겠다’고 말했다 어이없는 꼴을 당했다. 솔직히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에 갈 자신이 없어서 부린 응석이었는데 아버지의 대응 방식은 실망을 넘어 절망스러울 정도였다. 테니스 얘기를 꺼내자 아버지는 라켓을 챙겨 따라오라고 했다. ‘한바탕 게임하고 멋있는 애기로 마무리?’ 이런 기대를 하며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갔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아빠랑 한 게임 하자’시더니 신들린 듯 게임에 임했다. 결과는 나의 패배. ‘아버지 테니스 언제 그렇게 잘 쳤어요?’ 하고 묻는 나에게 아버지는 무뚝뚝한 목소리, 눈도 마주치지 않은 상태에서 ‘공군 시절(30년 전이다)에 배웠는데 아직 죽지 않았네’ 하더니 이런 멘트를 날렸다. ‘새끼야, 아버지한테도 지는 실력으로 무슨 체육대야? 미친놈! 헛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운 좋게 ‘인서울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게 학교냐?’ 당신도 그 대학을 나와놓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공익근무 중인 나는 나름대로 내 시간을 즐기고 있다. 퇴근 후 도서관도 가고 친구들 만나 술도 한 잔 한다. 귀가가 늦을 때마다 우리 꼰대 하시는 말씀, ‘나랏일 하는 놈이 허구한 날 늦게 다녀서 어쩌려고 그러냐, 지각이라도 하면 큰일 아니야?’ 풋! 공익도 나랏일인가?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우리 아버지는 여지없는 꼰대다.

 

▶응답하라 1980 | 22세 B씨, 대학생

아버지 인생의 전성기는 1980년대였다. 그때는 증권회사가 가장 잘 나가는 직장이었다고 일년에 상여금을 1200% 받았다는 사실도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아버지 눈이 반짝반짝할 때는 딱 그때 뿐이다. 전성기 때 자랑 늘어놓을 때 말이다. 증권회사 직원 한 사람이 하루에 수십 억원의 주식 매매를 결정한다는 사실도 아버지를 통해 들었다. 잘 나가던 증권맨 울 아버지는 IMF 때 쫄딱 망했다며, 그 일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강남에 아파트가 서 너 채는 있을 것이라며 아쉬워 하신다(참고로 아버지 집은 28평형 전월세다, 이것만으로도 감사하긴 하다). 증권회사 직원이었던 울 아버지가 주식으로 돈을 벌어 지금 아파트 재벌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내부 정보와 차명계좌를 이용했다는 말인데, 울 아버지는 그걸 성인이 된 내게 자랑과 아쉬움으로 말씀하신다. 돈 얘기 말고도 문화, 트렌드 등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내용은 모두 1980년대 이야기다. 아버지의 문화적 성장은 1980년대에서 멈춘 게 틀림없다. 그 이유가 ‘가족을 위한 희생’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콧날이 시큰해지지만, 오랜 세월 매일 술 마시고 늦게 들어 오셨던 그 시간에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공부 좀 하셨으면 어땠을까? 감히 그런 생각도 해본다.

 

▶성공한 친구가 당신은 아니잖아 | 38세 G씨, 직장인

동기 가운데 툭하면 ‘내 친구가 100억원을 벌었는데’, ‘이번에 대박 터트린 아무개가 우리 동창이야’, ‘국회의원 누구누구가 내 친구 작은 아버지야’, ‘총괄 본부장 된 K부장이 알고보니 학교 선배라네?’ 등등 자기 주변인 중 잘 나가는 사람들을 자랑삼이 떠드는 친구가 있다. 정체성 없이 허구한 날 인맥이나 챙기는 놈인 것이다. 잘 나가는 그 친구, 삼촌들이 이 친구를 알기나 하는지, 젊은 나이에 후배들에게 꼰대 소리나 듣고, 잘 하는 짓이다.

 

▶정치 얘기 작작 좀 합시다 | 35세 C씨, 직장인

업계 선배 가운데 ‘존경했던’ 사람이 있다. 40대 후반의 그는 정치적 식견이 뚜렸하고 역사관도 확실한 분이다. 그의 이론대로 세상이 돌아간다면 세상이 얼마나 즐겁고 활기차 질지 기대될 정도다. 그런데 이분, 자기가 무슨 로마 시대의 예수라도 되는 양 둘 이상만 모이면 정치 강론을 펼친다. 누군가 다른 얘기를 꺼내 대화를 돌려놓으면 또 어느 순간 말꼬리를 정치판으로 끌고 들어간다. 정치를 외면해서는 안되지만 모든 대화를 정치와 연결시키는 것은 정말 피곤하고 짜증나는 일이다. 특히 꼰대 선배들은 정치 토론을 제대로 할 줄도 모른다. 충분히 듣고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아주 쉽게 열 받아서 상대방 말을 잘라버리고 언성을 높이는 ‘기-승-전-싸움’이라는 그 공허한 대화 때문에 우리의 소중한 시간은 또 얼마나 많이 날아갔는지.

 

▶꼭 출근시간에 등산 가야 하나요? | 29세 D씨, 직장인

이 나라는 오늘의 50~60대에 대한 준비를 너무 소홀했던 게 확실하다. 통계에만 근거한다면 그들이 앞으로 살아갈 시간은 30년 안짝이다. 모든 퇴직자들이 그럴리는 없겠지만 어떻게 아직 한창 일할 나이대의 그분들이 허구한 날 등산을 다니는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에 있다 치자. 그런데 왜 꼭 등산을 가도 출근시간에 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요즘 출근시간은 직장 현관에 사원증 찍는 시간이 아니라 집에서 나와 직장에 도착하는 과정 모두가 출근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오전 6시부터 시작된다. 사생활을 갖고 꼰대 운운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렇게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는 분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는 것은 문제다.

 

▶저 입을 틀어막고 싶어 | 34세 E씨, 직장인

꼰대들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공통점이 있다. 직장이든 모임이든 꼭 그런 꼰대들이 있다. 평생 누구와 대화 한 마디 못하고 살았는지 후배들만 보면 인삿말이 기본 30분. 1분이면 끝낼 덕담을 한 시간씩 늘어놓는 건 거의 테러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요즘 2030세대는 문자 세대다. 그런 세대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는 격이니 그런 사람을 누가 존경하는 어른으로 생각하겠는가. 레퍼토리나 다양하면 또 모르겠다. 맨날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가르치지 못해 안달 | 35세 F씨, 직장인

친구들 사이라도 잘난 척 하는 놈들이 꼴보기 싫은데, 아는 척 하는 꼰대들은 너무 싫다. 독서클럽 비슷한 지역 커뮤니티가 있다.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나이대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모임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딱 한 사람 만큼의 권리와 의무를 지니길 바란다. 그런데 50대 그 분은 혼자 열 사람 할 말을 다 해버린다. 어투도 딱 선생이다.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을 놓고 강의하듯 떠들어댄다. 배울 게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정도와 절제미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분 때문에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 숫자도 줄어들고 있다.

 

 

문제는 예의다, 도대체 무엇을 배우며 세월을 보냈나

꼰대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예의’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꼰대 소리를 듣는 그들도 한때는 예절 바른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직위가 올라가고 경제적 안정기에 도달하면서 꼰대로 탈피한다. ‘예의’는 인문학적 의미이지 입장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전략적 개념이 아니다. 예의의 대상은 나를 제외한 삼라만상이다. 인간은 물론, 반려동물, 길거리에서 만나는 고양이, 산책길의 소나무, 학창 시절을 촉촉하게 해주었던 소설책, 아버지가 물려준 낡은 책상 등등 모든 것의 의미를 알고 의리를 지키는 것은 성숙된 인간의 당연한 자세다.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직위가 높으면 예절을 지키고 어리면 막 대해도 된다는 것을 누가 가르쳤는가. 나이를 떠나 한국인 대부분은 처음 보는 초등학생에게 말을 놔버린다. ‘너 이름이 뭐니, 아버지 뭐하셔?’ 이런 식이다. 아이와 인사를 할 때는 ‘짜식, 귀엽게 생겼네? 몇살이냐?’라고 이야기하는 식이다. 식당에 들어가면 직원들이 인사를 한다. 예절을 기준을 보면 손님도 인사를 하는 게 보기 좋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이, 여기 해장국 둘! 막걸리 먼저 줘~’ 이다. 이런 대우를 받는 상대는 속으로 대응한다. ‘저런 꼰대새끼!’

 

▶당신도 숨은 꼰대일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독립적인 인격체이다. 그것은 친구 등 동년배는 물론 부모와 자식, 간부 사원과 평사원,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람은 모두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존재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중력이 존재한다. 그것이 예의다. 예의라는 중력이 없다면 허구한 날 싸움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꼰대는 그 기본적인 예절을 무시하는 순간 탄생한다. 스스로 반성하거나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이면 다시 ‘좋은 어른’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인류 보편적인 예의가 ‘상대적 태도’로 변질된 것은 가정교육에 소홀한 부모와 서열 문화 때문이다. 꼰대 소리를 제일 많이 듣고있는 세대인 50대 이상은 물론 ‘꼰대’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20~30대 역시 대학입시와 취직시험에 함몰된 채 인문과 철학 등 인간의 기본과 우주의 원리를 생각하게 하는 기초 학문을 배우지 못했다. 그렇다, 못배워서 꼰대가 된 것이다.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세계관을 넓히자

모든 책임은 학교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 애들 교육을 학교라는, 여전히 학생들을 운동장에 세워놓고 교장이 훈시를 늘어놓는 일제시대 때의 문화에 전적으로 의탁하거나 과외선생과 학원이라는 ‘교육상인’들에게 일임한 부모 책임이 더 크다. 자녀들과 대화하고 가정교육에 신경쓰려면 부모도 공부하고 사색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학교나 학원에 맡겨버렸으니 공부할 이유도 없다.

‘먹고 살려다 보니’라는 ‘생존 이데올로기’는 자식 교육까지 망쳐버린 결과를 낳았다. 그나마 오늘의 50대 이상들은 부모로부터 ‘가정교육’을 받아본 세대다. 그런 그들이 ‘꼰대’ 소리를 가장 많이 듣는 이유는 가정교육으로부터 졸업한 뒤 세상에서 배운 게 천박한 서열 문화뿐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학년 서열, 성적 서열, 싸움 서열을, 대학에서는 복학생 서열을, 군대에서는 계급 서열, 배경 서열을, 직장에서는 기수 서열, 사회에서는 재산 서열을 배웠다.

 

▶‘수평적 사고’도 꼰대탈출법 중 하나

그 어떤 과정에서도 수평적 관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2학년은 1학년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해도 괜찮고, 교사는 공부 잘 하는 학생을 대놓고 편애한다. 상병은 잠자고 있는 일병을 깨워도 상관없고, 대령 사모님이 대위 부인의 마님이 되며, 어떤 팀장님 집 이삿날은 팀원들 특근날이 되는 경우도 생겼다. 한때 ‘수평적 사고’가 미래의 화두로 떠오른 적이 있었다. 수직적 사고보다 창의적이고 평등한 개념이니 당연히 지지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누가 수평, 평등을 이야기하는가. 한 사람이 명령하면 모두가 따라야 하는 계급적 문화가 오히려 과거보다 더 강하고 공고하게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꼰대는 자신이 꼰대라는 점이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꼰대는 자신이 꼰대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꼰대는 자신처럼 살아야 성공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새로운 후배 꼰대를 양성하는 것이다.

꼰대는 선량한 사람들의 일상을 고단하게 만들고, 웃고 떠들며 자유로워야 할 청년 세대를 짓누르는 개인이자 문화다. 꼰대가 사라져야 하는 가장 크고도 절실한 이유는 ‘꼰대를 옆에 두고 살며 그 꼰대를 욕하던 청년이 어느날 똑같은 꼰대가 되어버린다’는 엄연한 현실 때문이다. 좋든 싫든 꼰대를 보며 성장한 세대는 보고 배운 게 그뿐이라 결국 꼰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꼰대 탈출법
세계관을 자신의 수명에 넣지 않는 게 탈출의 제일법칙이다. 길게 살아야 100년인 삶이지만 인간의 생각과 상상력은 무한대 시간을 누릴 수 있다. 50대 친구들끼리 모여 ‘100년 뒤 우리 아파트 단지의 숲’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친구들은 눈빛이 흔들린다. 100년 뒤 시간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냐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의 숲이 울창해지고 건물운 아름다운 빈티지 빛을 발하며 그 오솔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과 산책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생각하고 공유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은 나와 상관없는 시간이 아닌 바로 나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조성되어 있는 조경지역의 간벌 작업과 관련한 행정적, 실무적 준비를 하고 100년 뒤 인류의 심신을 품어줄 수종을 결정하고 함께 식목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세대의 연속성을 느끼게 되고 오늘의 삶도 풍요로워질 수 있다. ‘꼰대가 아닌 어른’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꼰대가 아니면 됐지 꼭 훌륭한 어른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멘토가 되려고 공부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자신의 삶과 미래의 세상을 학습하면 된다.

 

▶좀 더 다양한 세계관 키워야

인류의 가장 뛰어난 스승은 ‘생각하는 자신’이다. 누구나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지 좋은 어른의 삶을, 성공한 멘토의 삶을 답습할 필요는 없다. 단지 보편적 삶에 대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소통의 짜릿함에 대해 공부하고 성찰하고 실천하는 태도는 필요하다. 세상이 가르쳐주지 않은 ‘인간다운 삶’을 늘그막에라도 공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일이다. 좋은 책을 읽고, 금연·금주·금욕 등 나이에 걸맞는 절제된 생활을 하고, 일기든 자서전이든 자신만의 글을 쓰고, 도움이 될만한 강연을 체계적으로 듣고, 가끔 자연으로 들어가 우주의 소리에 귀기울여보는 철학적 삶이 그것이다. 가장 중요한 꼰대 탈출법은 ‘세상은 미래의 것’이라는 진리를 인정하는 일이다. 오늘의 꼰대도 어렸을 때는 세상의 미래였고, 세상의 주인공답게 열정적인 청년, 중년, 장년으로 살아왔다. ‘은퇴한, 또는 은퇴가 가까운 지금도 세상은 오직 우리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노욕에 불과하다. 미래 세대가 원하는 세상이 되도록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오직 내 것만이 옳다’며 방해해서야 되겠는가.

 

[글 황지영(재미 세대문화칼럼니스트) 사진 및 일러스트 포토파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504호 (15.11.24일자) 기사입니다]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