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광저우 이야기』란 책을 펴내기 위해 황푸군관학교 뒷산을 답사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언덕길 한 편의 학생열사묘지를 무심코 지나치던 그의 눈에 ‘한국’이란 글자가 꽂혔다. 대부분이 중국인의 것인 묘비 66기 가운데 딱 두 기에만 적힌 글자가 우연찮게 강 박사의 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그는 “산을 내려오는데 두 분이 나 여기 있노라고 다리를 붙잡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묘비의 주인공은 안태와 김근제(金瑾濟)였다. 안태의 비에는 1927년 11월 숨졌다고 적혀 있었다. 당시 황푸군관학교는 한국인에게 학비를 면제해 주며 항일운동 투사를 양성했다. 학계에선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비롯, 200여 명이 황푸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그들은 이역 땅에서 맨주먹 하나로 고된 훈련을 견디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안태와 김근제도 그런 청년이었다. 즉시 군관학교 자료를 샅샅이 뒤졌지만 ‘사망동학(死亡同學)’이란 자료에 1926년 입교해 이듬해 숨졌다는 기록이 전부였다. 당시 군벌 할거와 국공 대립 등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 황푸군관학교의 생도들은 크고 작은 전투에 투입됐다. 강 박사는 안태와 김근제도 그 과정에서 희생돼 열사묘지에 묻힌 것으로 추정했다.
수소문 3년 만에 김근제의 후손이 나타났다. 알고 보니 조선혁명단원이자 국민당 비행장교로 일본군과 싸우다 희생된 팔촌형 김은제와 함께 입교했던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이었다. 뒤늦게 참배한 후손은 “하얼빈에서 독립운동 하다 돌아가신 줄 알았지 여기 묻혀 계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안태의 후손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사망 당시 28세였고 묘비에 ‘한국 괴산’이라고 적힌 게 유일한 단서다.
강 박사는 안태의 묘를 발견하던 날부터 독립운동 연구자가 됐다. 황푸군관학교 기록을 열람하다 보니 선열들의 피와 땀으로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걸 절감했고, 그럼에도 아직 우리가 모르는 역사적 사실들이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년을 눈앞에 둔 나이에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안태 열사는 90년 가까이 후손들도 모르는 속에 여기 묻혀 있다. 이런 분이 어찌 안 열사뿐이겠느냐. 우리가 선열들을 제대로 모시지 않는다면 다시 국난이 닥칠 때 누가 과연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서겠나.”
예영준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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