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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12월호] 최후 고려인, 최초 조선인의 엇갈린 운명

바람아님 2016. 11. 27. 00:13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6.11.26 00:01

정도전 : 썩은 기둥 위에 새 지붕 얹을 수 없듯 세상을 바꾸는 혁명을 실천
정몽주 : 더딜지언정 많은 사람을 포용하고 점진적 명분을 축적하는 개혁에 방점


21세기 영웅소환 프로젝트③ 정도전 - 정몽주
혁명을 통한 신권(臣權)정치를 꿈꿨던 정도전(왼쪽). 혁명보다 개혁을 추구한 정몽주. [중앙포토]

혁명을 통한 신권(臣權)정치를 꿈꿨던 정도전(왼쪽). 혁명보다 개혁을 추구한 정몽주. [중앙포토]


집권층의 부패와 수탈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했던 고려 말. 병든 나라를 개혁하고자 새로운 희망을 제시했던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 역성혁명과 조선의 건국을 놓고 둘의 운명은 엇갈렸지만 이들의 정신은 새로운 시대의 주춧돌이 됐다. 포은과 삼봉이 강조했던 애민 정신은 오늘까지 리더십의 사표로 전해 내려온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가슴 아픈 단어는 ‘헬(hell)조선’이다. 귀족사회처럼 신분이 고착되고 온갖 부조리가 나라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의미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설득력을 잃고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수저(금·흙)가 엇갈린다. 세습된 부와 권력의 장벽은 너무 공고해 신분상승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일자리조차 갖기 어려운 청년들은 살 집을 구하는 일은 먼 남의 일이다.

놀랍게도 ‘헬조선’이 나타내는 사회상은 14세기 후반 고려의 모습과 빼닮아 있다. 원나라를 등에 업고 권력과 부를 독차지한 권문세족(權門世族)은 과거(科擧)가 아닌 음서(蔭敍)를 통해 벼슬을 대물림하고, 백성의 토지를 빼앗아 세습하며 거대한 부를 축적한다. ‘송곳 하나 꽂을 땅(立錐之地·입추지지)’이 없다는 말도 이때 나왔다. 1451년 문종 때 편찬된 <고려사(高麗史)>는 당시 시대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간악한 도둑들이 백성의 땅을 빼앗는 경우가 많았다. 그 규모는 한 주(州)보다 크기도 하고 산과 강을 경계로 삼는다. 남의 땅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며 주인을 내쫓는다. 빼앗은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해 각자 세금을 걷어가기도 했다.”

‘간악한 도둑’은 바로 권문세족을 지칭한다. 이들이 소유한 땅이 워낙 넓어 산과 강을 경계로 토지를 나눴다. 소작농에게 여러 주인이 각자 세금을 걷어가고 제때 내지 못하면 돈을 꿔주어 고액의 이자를 갚게 한다. 끝내 빚을 갚지 못한 백성들은 노비로 만든다. 14세기 고려는 대들보가 썩어 들어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오래된 기와집과 같았다.

이처럼 어지러운 시대를 개혁의 꿈으로 헤쳐나갔던 두 인물이 있다. 포은 정몽주(1337~1392)와 삼봉 정도전(1342~1398). 나이는 정몽주가 다섯 살 위지만 이들은 함께 성리학을 공부한 친구였고 새로운 세상을 더불어 설계했던 동지였다. 백성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바탕으로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진 포은과 삼봉. ‘헬(hell)조선’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들의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고려말과 헬조선
이 대담에는 포은의 20대 손이며 40여 년간 정몽주를 연구하고 삶 속에서 그 정신을 실천해온 정의화 전 국회의장과 KBS 사극 <정도전>을 집필하기 위해 수십 권의 관련 서적을 공부하며 전문가들을 찾아 인터뷰한 정현민 작가가 참여했다. 대담은 11월 6일 서울 여의도의 한 중식당에서 진행됐다.
 
정의화 1948년 출생. 전 국회의장. 정몽주의 20대 손으로 40여 년간 포은의 철학을 연구하고 실천해왔다.  정현민 1970년 출생. 전 국회의원 보좌관. KBS 사극 <정도전>을 집필했다. 역사와 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을 주로 쓴다.

정의화 1948년 출생. 전 국회의장. 정몽주의 20대 손으로 40여 년간 포은의 철학을 연구하고 실천해왔다.
정현민 1970년 출생. 전 국회의원 보좌관. KBS 사극 <정도전>을 집필했다. 역사와 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을 주로 쓴다.


1367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목은 이색(1328~1396)은 고려 말 혼란한 사회의 새로운 규범으로 송나라의 주자가 완성한 성리학을 들여왔다. 이미 그의 문하에는 수십 명의 유생이 과거시험을 앞두고 글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중 성리학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청년이 있었는데 바로 정도전이었다. 조부가 지방 향리 출신인 정도전은 출신 성분에 따라 서열이 엄격했던 고려사회에서 철저한 ‘비주류’였다.

비슷한 시기 이색과 교류하며 성리학을 공부했던 정몽주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통해 자신의 정치철학을 완성해갔다. 이색은 자신의 책 <목은집(牧隱集)>에서 정몽주를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고 명했다. “포은의 논리는 어떤 말을 해도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게 이색의 평가였다.

이색을 매개로 정몽주와 정도전은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게 됐고 다섯 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둘도 없는 친구로 발전해갔다. 당시 정몽주는 자신이 공부했던 맹자를 정도전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정도전은 맹자가 설명하는 주나라 무왕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무왕은 혁명으로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이를 맹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한다. 잔적지인(殘賊之人)은 단지 ‘그놈’이라고 하니 무왕이 ‘주(은나라의 마지막 왕)’라는 놈을 처형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정도전은 이 같은 맹자의 사상을 통해 훗날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혁명가 정도전 역을 맡은 조재현. [중앙포토]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혁명가 정도전 역을 맡은 조재현. [중앙포토]


정도전(삼봉)_ “14세기 고려는 도탄에 빠진 백성과 이를 나 몰라라 하는 지도층의 탐욕이 끝이 없었네.”

정몽주(포은)_ “당시 고려는 나라다운 나라가 아니었네. 굶어 죽는 백성들이 도처에 널렸는데 권문세족들은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데만 혈안이 돼 있었지.”

삼봉_ “그게 모두 탐욕스러운 지도층과 무능한 왕조의 탓이었네. 물은 배를 띄우지만, 그 배를 뒤집는 것 또한 물일세. 그것이 맹자의 핵심 철학 아니겠는가.”

포은_ “안타까운 건 지금 시대가 우리가 난세로 생각했던 그 고려 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게지. 오죽하면 우리 후손들이 현 시대를 ‘헬조선’이라고까지 부르겠는가.”

삼봉_ “대한민국 토지의 55%를 상위 1%가 갖고 있다는 통계도 있네. 어찌 보면 지금의 양극화 현상은 고려 말보다 더 심각한 것일 수도 있어.”

포은_ “광장을 가득 메운 민심의 촛불이 그러한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네. 시민들은 더 이상 한국의 부조리한 현실을 참고만 있지 않겠다는 뜻이지.”

삼봉_ 청“ 년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신음하고 젊은 부부들은 집을 살 수 없고 양육비가 없어 아이 낳는 것도 꺼린다네. 이 시대도 잘못하면 고려처럼 무너질 수 있다는 심각한 경고
를 위정자들이 알아줬으면 하네.”

포은_ “근본적으론 물질적인 것만이 행복과 성공의 잣대라고 생각하는 게 큰 문제일세.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은 욕심을 부리고 그 과정에서 온갖 비리와 불법이 생겨나는 현실이 개탄스럽네.”

대담을 이어가던 정현민 작가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선 노트 하나를 꺼내 보였다. KBS 사극 <정도전>집필 당시에 썼던 노트다. 노트의 맨 앞장에는 ‘정(正)’이라는
한자와 ‘치(治)’라는 한자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정몽주와 정도전이 생각했던 정치는 ‘政治’가 아니라 ‘正治’였습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게 정치의 근본이라 생각했던 것이죠.”
 
신돈과 최순실
정 작가가 노트의 다음 장을 넘기자 ‘민본(民本)’이라는 글자가 노트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왕조와 귀족을 위한 사회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사회시스템을 만드는 것. 그게 정도전
이 설계했던 새로운 세상의 목표였습니다.” 정 작가는 “<삼봉집(三峯集)>을 보면 ‘백성은 우매해 속이기 쉽고, 연약해서 군림하기 쉽지만 이런 군주는 백성들이 버린다’고 돼 있다”며 “정도전은 아마 지금의 시대를 그러한 때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358년, 공민왕은 재위에 오른 지 7년째 된 어느 날 기이한 꿈을 꿨다. 꿈속에서 자객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데 때마침 한 승려가 달려와 구해줬다. 며칠 후 측근인 김원명이 신돈을 데려
와 소개했다. 알고 보니 공민왕이 꿈속에서 본 그 승려였다. 이후 신돈은 궁궐을 자주 드나들며 공민왕의 책사 노릇을 했다.

신돈이 본격적으로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365년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혼자가 된 외로움을 신돈에게 의지하면서 끝내는 국정까지 맡겼다. 처음 신돈은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수탈했던 토지들을 백성에게 나눠주는 등 개혁 정책을 펼쳤다. 과거제도를 개혁해 정몽주와 정도전 같은 능력 있는 이들을 발탁했다.

그러나 신돈은 “다른 사람의 참소를 믿지 말아야 세상이 풍요롭다”는 등의 주장을 하며 공민왕의 눈과 귀를 가렸다. 군주의 절대적 신임은 부패로 이어졌다. 신돈은 개혁 정신을 잃고 비리의 온상이 됐다. 모든 신하가 왕을 따라 무릎 꿇고 절을 하며 왕릉을 참배할 때도 신돈은 뻣뻣이 서 있었다. 신돈의 기세가 갈수록 등등해지자 원로 대학자였던 이제현이 상소를 올려
신돈을 멀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오히려 이제현의 후학들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는 화를 당했다.

신돈의 횡포가 커지자 공민왕의 신임도 옅어지기 시작한다. 이 무렵 공민왕을 제거하려는 마음까지 품었던 신돈은 1371년 반역죄로 참수된다. <고려사>에서 공민왕 후기의 신돈은 개혁가이기보다는 요승으로 묘사돼 있다. ‘주지육림에 빠져 있기 일쑤였고 양가의 부녀자들을 희롱했다’고 기록됐다. <고려사>신돈열전의 마지막 부분엔 이렇게 쓰여 있다. ‘날마다 검은 닭과 흰 말을 잡아먹었다. 사람들은 신돈을 늙은 여우의 요괴라고 불렀다.’

11월 2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마치고 서울구치소로 향하는 호송차에 오르는 최순실 씨.

11월 2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마치고 서울구치소로 향하는 호송차에 오르는 최순실 씨.


삼봉_ “‘최순실 사태’는 요승의 행적과 많은 면이 닮아 있네. 적어도 신돈은 초기 개혁가로 불렸지만 ‘최순실’은 그저 국정농단일 뿐 아닌가.”

포은_ “고려 때도 왕은 경연으로, 태자는 서연으로 모든 일을 신하들과 의논하고 공부하며 국사를 결정했지. 어엿하게 삼권이 분립돼 있고 행정부에는 각 부처의 장관이 책임을 맡고 있네. 고려인의 눈으로 보더라도 비선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아.”
 
‘애민(愛憫)’의 정치
드라마에서 정도전은 민생현장을 몸소 체험하는 캐릭터로 나온다.

드라마에서 정도전은 민생현장을 몸소 체험하는 캐릭터로 나온다.


삼봉_ “오히려 지금 시대의 대통령이 과거보다 더욱 왕과 같은 위치에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그래도 이전엔 목숨을 걸고 간언하는 신하들이라도 있지 않았나. 지금은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신하들이 안 보이는 것 같네. 술에 취한 우왕이 개경 시내에 나가 개를 때려잡는 경우가 많아 백성들이 왕만 나서면 개를 숨기기 바빴지. 그러다 권근(1352~1409)이 ‘금수와 다
를 바 무엇이냐’며 왕에게 직언했네. 우왕이 화살까지 겨눴지만 결국 충신으로 남았네.”

포은_ “대통령 자신의 리더십도 문제일세. 리더는 귀가 열려 있어야 하네. 본인이 마음을 열고 소통하지 않는데 무슨 직언이 이뤄지겠나. 물론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들의 죄도 크네. 무조건 따르기만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충신이 아닐세. 이들이 간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삼봉_ “오늘날 사람들이 유교를 이야기하면서 안 좋은 것만 떠올리는 것 같네. 유교 국가에서 왕이 절대적 권력을 가질 수 있던건 모순적이지만 신권의 견제가 가능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 한국의 대통령제는 신권은 없고 왕권만 남아 있는 것 같네.”

정몽주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정 전 의장이 조그만 메모지를 꺼내 두 개의 한자를 썼다. ‘正(바를 정)’과 ‘名(이름 명)’이다. “군주는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않은 게 문제입니다. 각자의 역할을 알고 그것에 충실한 ‘정명(正名)’이란 공자의 가르침이 제대로 됐더라면 지금 같은 ‘최순실 사태’도 없었을 겁니다.”

이어 정 전 의장은 정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더 이상 계파를 만들고 국민을 현혹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선 안됩니다. 사사로운 이익에 따라 계파를 만들고, 그 수장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건 간신일 뿐입니다.” 그는 “정몽주가 현실의 정치인들을 봤다면 매섭게 꾸짖고 엄벌에 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374년 개혁의 군주였던 공민왕이 죽으면서 친명파(親明派)였던 정몽주와 정도전은 정치적 위기를 겪는다. 친원파(親元派)인 권문세족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이들은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며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정도전은 권문세족이 왕의 눈과 귀를 가린다며 거센 비판을 가했는데 이는 향후 이인임 등 집권세력의 눈 밖에 나는 계기가 됐다.

1375년 귀양길에 오른 정도전은 허름한 초가에 살며 백성들의 민낯을 보게 된다. 1377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엔 4년간 전국을 유랑하며 지냈다. 스스로 밭을 갈아 농사를 짓기도 하고 걸식까지 했다. 책에서가 아닌 직접 두 눈으로 오랜 가난과 귀족들의 횡포로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면서 정도전은 ‘애민(愛憫)’ 의식을 가졌다. 그렇게 10여 년간 귀양과 유랑을 반복하며 정도전은 ‘민본(民本)’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된다.

1384년 정도전은 자신의 꿈을 함께 이룰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갔다. 바로 이성계다. 당시 이성계는 함경도에서 여진족의 토벌을 책임지는 동북면도지휘사를 맡고 있었다. 정도전은 당시 이성계와의 만남에서 “이 정도의 군대면 무엇인들 못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리고 정도전은 군영 앞의 큰 노송에 시 한 편을 남기고 떠났다. ‘역성혁명’을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정도전이 쓴 <삼봉집>의 목판본. [중앙포토]

정도전이 쓴 <삼봉집>의 목판본. [중앙포토]


포은_ “우리가 꿈꿨던 세상은 백성을 위한 나라일세. 하지만 고려를 폐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엔 반대일세. 개혁은 더딜지언정 많은 사람을 포용하고 점진적으로 이뤄져야만 명분을 얻을 수 있네.”

삼봉_ “이미 썩은 기둥에 기와를 새로 올린다고 그 집이 견고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혁명처럼 일어나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네. 자네가 혁명을 반대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없네.”
 
왕조와 귀족을 위한 사회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사회 시스템.
그게 정도전이 설계했던 세상의 목표였습니다. <삼봉집>을 보면
‘백성은 우매해 속이기 쉽고, 연약해서 군림하기 쉽지만 이런
군주는 백성들이 버린다’고 돼 있습니다.” _정현민 작가

군주는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않은 게 문제입니다.
각자의 역할을 알고 그것에 충실한 ‘정명(正名)’이란 공자의 가르침이
제대로 됐더라면 지금 같은 ‘최순실 사태’도 없었을 겁니다.”
_정의화 전 국회의장

다음 대통령의 자격
포은_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유일한 한 가지는 ‘애민’일세. 오직 백성을 위한 정치만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네. 백성 입장에서 고려인이나 조선인인들 무슨 큰 차이가 있겠는가. 국호만 바뀌었을 뿐 생활이 나아진 게 없다면 오히려 혼란만 더욱 커질 뿐이네.”

삼봉_ “수백 년을 내려온 잘못된 폐습이 점진적 개혁으로 고쳐질 것이란 생각은 동의할 수 없네. 하지만 자네가 말한 ‘애민’은 내가 꿈꿨던 세상의 가장 핵심 철학이네. 내년에 한국은 또다시 중대한 기로에 설 것일세. 그때는 꼭 ‘애민’을 갖춘 리더가 대통령이 돼야 하네.”

포은_ “다음 대통령은 꼭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면 좋겠구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능력만 출중하면 덕성은 조금 부족해도 된다고 스스로 타협을 해왔지. 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까지 달성한 지금 시대에는 다양성을 인정하며 민의를 조화롭게 모으는 협의의 리더가 필요하네. 그러려면 대통령 스스로가 ‘덕치(德治)’를 펼쳐야 하지.”

삼봉_ “‘덕치(德治)’의 핵심은 ‘애민’일세. 국민을 위해선 자신의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리더가 필요하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이 됐는데. 진정한 리더라면 국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까지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하지. 지금 한국 사회도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어. 이를 진심으로 고민하고 소통할 수 있는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보네.”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몽주는 개혁을 열망하지만 역성혁명은 반대한다. [중앙포토]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몽주는 개혁을 열망하지만 역성혁명은 반대한다. [중앙포토]


1392년 4월 4일. 말에서 떨어져 병환에 있던 이성계를 정몽주가 문안을 갔다. 그때 이성계의 아들 방원은 ‘하여가(何如歌)’라는 시로 정적이었던 정몽주를 회유했다. 그러나 정몽주는 바로 ‘단심가(丹心歌)’를 지어 방원에게 건네며 회유를 뿌리쳤다. 방원의 요구를 거절한 정몽주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경의 선죽교에서 방원의 칼에 쓰러진다.

정몽주가 죽고 넉 달 후(8월5일) 이성계는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했다. 이처럼 선죽교에서 피를 쏟으면서까지 정몽주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단심가’의 님은 단순히 고려라는 왕조의 운명뿐이었을까. 정 전 의장은 “백성만이 유일한 정치의 목표였다”며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놓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고 민생을 혼란에 빠트리는 것 자체가 백성에 죄를 짓는 거라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몽주의 위폐와 영정을 모신 경기도 용인시 충렬서원. [중앙포토]

정몽주의 위폐와 영정을 모신 경기도 용인시 충렬서원. [중앙포토]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번(一百番) 고쳐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단심가)

건국 3년째인 1394년 정도전은 조선 최초의 헌법인 <조선경국전>을 지어 올렸다. 왕명이 곧 헌법이었던 시절 정도전의 이같은 행동은 왕으로부터 큰 미움을 살 만큼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애민’을 통한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선 법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조선경국전>의 핵심은 권력 분점이다. 당시 조선은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법체계를 갖고 있지 않아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사실상 개헌 논의의 시발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그 동안 꿈도 못 꿨던 새로운 제도들이 담겨 있다. 왕권과 신권의 견제를 통한 시스템 정치를 강조했는데 모든 중대사는 임금과 신하가 논의해 결정토록 했다. 왕은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었으며 주요한 지출은 모두 재상에게 보고토록 했다.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다

10월 29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다. [중앙포토]

10월 29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다. [중앙포토]


정 작가는 “왕은 승계되기 때문에 성군과 폭군이 모두 나올 수 있다”며 “밑에서부터 다듬어지고 실력을 검증받은 재상이 실질적인 나라 운영을 맡아야 한다는 게 <조선경국전>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조선경국전>은 훗날 후대 학자들의 손을 거쳐 1485년 성종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으로 완성된다.

<조선경국전>에는 경제와 외교, 군사 등 나라의 중요한 정책부터 백성들의 관혼상제까지 성리학에 입각한 다양한 가치·질서가 망라돼 있다. 특히 토지의 분배와 세제에 대한 내용은
근대의 법체계와 비교해도 큰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해 군현제와 호적제를 정비하고 공정한 조세를 실시토록 했다. 또 토지를 균등히 분배하고 ‘농상(農桑)’을 장려해 중산층을 키우도록 했다.

포은_ “1987년 이후 6명의 대통령은 모두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네. 근본적인 이유는 독점된 권력 때문이라고 보네. 견제와 균형이 올바르게 이뤄진다면 ‘최순실’과 같은 인물도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네.”

삼봉_ “600년 전 우리가 꿈꿨던 세상도 왕권과 신권이 조화로운 세상이 아니었나. 하물며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인 지금이야 두말할 나위 있겠는가.”

포은_ “한번 상상해보게. 권력의 독점으로 대통령에게 모든 결정의 부담이 주어진다는 것을.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 오더라도 그 큰 부담을 어떻게 혼자서 짊어질 수 있겠나. 권력의 분점은 그 누구보다 대통령을 위해 필요한 일일세.”

삼봉_ “동의하네, 다만 우리에겐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는 대통령이 필요하지. 의원내각제는 군주와 귀족이 타협해 만든 것이지만 대통령제는 절대 왕권으로부터 국민이 직접 쟁취해낸 것이네. 국가의 어른으로서 대통령과 내치를 담당하는 총리를 두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보네.”

포은_ “87년 체제론 21세기 한국을 이끌어가기에 부족한 면이 많네. 권력구조뿐 아니라 지방분권과 통일 이후 한국까지 생각한 개헌이 이뤄져야 하네. 헌법엔 당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시대정신이 담겨야 하기 때문이지.”

삼봉_ “헌법 1조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이네. 즉, 민주와 공화 두 개의 가치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지향점일세. 함께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공동체의 가치가 더욱 강조돼야만 한다고 보네.”

정도전이 설계한 조선은 덕(德)으로써 다스려지는 나라였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그는 동서남북의 중심에 사대문을 뒀다.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이다. 숙정문의 ‘정(靖)’은 꾀를 뜻하는 말로 당시 조선에선 ‘지(智)’와 비슷한 의미로 쓰였다.

이처럼 정도전은 사대문 안에 맹자의 핵심사상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넣어 조선의 가치적 지향점을 제시했다. 정 작가는 “한양의 한복판에는 보신각(普信閣)을 지어 ‘신(信)’을 강조했다”며 “정도전은 조선을 민본을 바탕으로 유교 원리에 따라 작동되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정도전이 유년시절을 보낸 영주시 가흥동 삼판서 고택. [중앙포토]

정도전이 유년시절을 보낸 영주시 가흥동 삼판서 고택. [중앙포토]


도덕성의 회복
포은_ “집을 지으려면 땅을 파고 주춧돌부터 바로 잡아야지. 요즘 우리 교육은 물질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네. 가정이 무너지고 학교가 어지럽고 사회까지 혼란스럽네. 방향을 잃어버린 게지.”

삼봉_ “지금 교육은 승자만 키우는 교육이지. 아이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게 열등감이야. 완성된 인격체를 만들려는 교육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아.”

포은_ “어른이 돼서도, 사회 지도층에 올라서도 마찬가지야. 인격이 바로 돼 있지 못하니 온갖 집권층의 비리와 부패가 발생하는 것일세. 그동안 대한민국이 너무 빠르게 물질적으로 성
장하면서 도덕을 잃어버렸어.”

삼봉_ “사회에서도 도덕성은 떨어져도 능력만 있으면 됐지 하는 풍조가 컸던 것 같네. 하지만 앞으로는 유학을 공부했던 ‘선비’처럼 지도층이 모범을 보여야 하네.” 정몽주와 정도전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도덕성의 부재에서 찾았다. ‘수신(修身)’이 되지 않으면 ‘제가(齊家)‘를 할 수 없고 ‘치국(治國)’도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끝으로 두 영웅은 고려말의 사회 혼란이 재발하지 않도록 지도층에게 시대적 소명을 당부했다.

“두 가지만 기억해주길 바라네. 첫째는 ‘애민’일세. 국민을 위하는 마음과 여기서 비롯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더욱 도탄에 빠지는 게지. 둘째는 지나친 양극화를 꼭 해결하고 중산층을 키워달라는 주문이네. 보통의 시민들은 항산(恒産: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항심(恒心: 일정불변하는 양심)할 수 없네. 시민들의 삶이 불안정하면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사회는 혼란에 빠지지. 음서제와 입추지지란 말이, ‘헬조선’이란 자조가 다신 나오지 않도록 해주길 바라네.”

대담 = 정의화 전 국회의장(정몽주 20대손), 정현민 작가(KBS 사극 < 정도전> 집필)
진행·정리 =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사진 오종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