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 시인, 동아대 명예교수
요즘엔 참 희한한 버릇 하나가 생겼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얼른 전신거울부터 보는 버릇이다. 나의 어깨가 똑바른가, 옆으로 서 보고, 앞으로 서 보고, 11자로 서 보고, 한 어깨를 올리고 서 보고 한다. 이 버릇이 생긴 건 공원에서 만난 어떤 낯모르는 여자 때문이다.
얼마 전 공원에서 ‘걷기 트랙’을 돌 때, 어느 낯모르는 여자가 쫓아와 나를 불러 세웠다. 그 여자는 한쪽 어깨를 비뚜름히 들어 올리며 내게 말했다. “몇 번 아줌마를 보았는데, 어깨가 이렇게 삐뚤어졌어요. 물병을 오른쪽에 드세요. 늘 왼쪽에 물병이 들려 있더라구요. 그러니 더 비뚤어지지요?” 그러면서 다시 한 어깨를 비뚜름하게 해 보였다. 아주 볼썽사납게. 나는 놀라 되물었다. “내가 그래요? 이젠 괜찮은 줄 알았는데… 왼발도 절룩거려요?” 나의 물음엔 대답도 없이 그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내 앞을 지나갔다. 얼마나 걸음이 빠른지 곧 멀어져 버렸다.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멀어져 조그맣게 보이는 그 여자를 불러 세웠다. “여보세요…. 아줌마….” 그 여자는 돌아보았다. 나는 그 앞으로 뛰어가 “다시 말씀해 보세요. 어느 쪽 어깨요? 왼쪽? 오른쪽?” “오른쪽이 내려갔어요….”
그날 저녁, 나는 가끔 가곤 하는 국선도 도장의 원장과 내 어깨에 대해서 의논했는데, 역시 ‘그렇다’는 결론. 나는 실망하고 실망했다. 여러 가지로 토론한 결과 거울, 그중에서도 전신거울을 사서 자세를 비춰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교정하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찌어찌 전신거울을 마련했다. 전신거울에 비춰보니 과연 내 어깨는 비뚤어져 있었다. 내가 “내 어깨 좀 비뚤어지지 않았어요” 하고 묻기라도 할라치면 모두 괜찮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나의 어깨는, 그리고 나의 골반은 그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이 비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왼발도 다시 약간 절름거리는 듯이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요즘엔 거리를 걸어갈 때도 앞사람의 어깨를 유심히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공원에서 걷기를 할 때도 나를 추월해가는 사람의 어깨를 유심히 바라본다.
그런데 그 결과 깨달은 것은 거의 모든 사람이 어깨가 비뚤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는 똑바르다고 생각하는지 모르나, 모두 조금씩 비뚤어져 있었다. 어떤 이는 나보다 훨씬 심해 보여서 순간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최근에 TV의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재미있는 영화를 보았다. 후반부만 보게 되었지만, 충분히 감동적이었고 아름다웠다. ‘말더듬이 왕’에 관한 영화다. 그 영화는 세기의 사랑이라고 흔히 회자되는,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버린 에드워드 1세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초점은 에드워드 1세가 아니다. 하는 수 없이 왕위를 물려받게 된 조지 6세의 이야기가 그 영화의 대강(大綱)을 이루고 있다.
언어치료사와 함께 전시 대국민 방송을 하는, 정확히 말하면 ‘말더듬이 왕’에 관한, 그 장애 극복의 이야기다. ‘말더듬이 왕’이 마이크 앞에서 첫 말이 나오지 않아 버벅거리며 진땀을 흘리려 하면, 그 앞에 서서 언어치료사는 아름다운 교향곡을 지휘하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그 리듬에 맞춰 왕의 입은 열리고 연설문을 똑똑히 발음해 간다. 사람들은 왕이 아주 말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버킹엄 궁이 박수로 가득 찬다.
장애와 그 극복의 이야기가 주는 ‘상투적 감동’이 그 영화엔 없다. 그 대신 아름다운 인간의 헌신과 사랑의 모습이 영화가 진행되면서 마치 찻잎에서 차가 우러나듯, 곱디고운 선율 사이로 다가온다. 어찌 보면 ‘장애의 극복’이란 테마는 일견 정형화됐다고 할까. 당연한 메시지를 주게 마련인데, 그 영화는 순간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마치 장애가 리듬처럼 나에게 흡수된 것일까. 나도 장애를 가져서인가? 누구나 조금씩은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품고, 그러나 남모르게 그것과 싸우면서 살아간다는 메시지 때문인가.
아무튼 영화의 끝에 가면 왕이 말더듬이인 그 상황이 이상하고도 재미있다고 보이는 대신 아, 그럴 수도 있지, 나도 남들 앞에 서면 말을 좀 더듬지 하고 생각하게 되고, 주인공을 휩싸고 도는 음악을 들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내가 평생을 왼 다리를 질질 끌고 다녔으나, 그리고 경련이 나면서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강의를 계속하기 일쑤였으나, 그 때문에 가끔 비틀거리고 계단에서 고꾸라지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남들 모르게 얼른 일어나 무사히 여기까지 걸어온 것처럼.
곧 설이 돌아온다. 양력설이 너무 붐비는 탓에 해맞이를 음력설에 하던 때를 생각한다. 집 앞에는 마침 섬이 있었는데, 그 섬에서는 일몰과 일출이 동시에 보였다. 그 설 아침, 나는 그 섬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바다 한쪽은 해가 떠오르면서 밝은데 반대쪽은 컴컴한 바다를 보았다. 마치 우리의 남모르는 장애들처럼, 한쪽은 어두우나 다른 쪽은 밝게 걸어오고 있는. 검은 파도와 붉은 파도가 손을 꽈악 잡고 있는. 해가 떠오르니 그 붉은 파도가 바다를 걸어온다. 맞은편 검은 바다의 검은 파도를 안으며 걸어온다. 황혼이면 어두운 그 바다는 아침 바다의 그 밝음에 꼬옥 껴안기겠지.
이번 설에도 나는 그 바다로 가리라. 거기 ‘두 개의 해’가 새해를 여는 것을 바라보리라. 나의 장애가 나를 열며 앞으로 앞으로 미는 것도 바라보리라.
누구의 시구이던가, 아니 나의 시구? ‘네가 행운이다/네가 선물이다…’라고 혼잣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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