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형 재현 '베끼기 풍경화' 탈피, 하늘 소재로 독창적 화풍 선보여
거대한 기념비처럼 우뚝 선 풍차, 심술 궂은 자연에 맞선 영웅 같아
시공초월 소리없는 '울림' 이…
네덜란드의 하늘은 드라마틱하다. 그곳을 뒤덮은 먹구름은 끊임없이 자신의 형상을 바꾸면서 뭔가에 쫓기듯 잰걸음으로
달아난다. 이탈리아의 뭉게구름이 나른한 자태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길 때 이 북구의 격정적인 구름은 진한 단내를 풍기며
사방에 요란스럽게 흙먼지를 일으킨다.
잠시도 고정된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 그 광활한 공간은 마치 무상하게 흘러가는 인간 삶의 궤적을 추상화한 듯하다. 그
덧없는 자연의 스펙터클은 일출과 함께 시작돼 한나절 동안 숨가쁘게 전개되다가 황혼의 붉은 커튼과 함께 막을 내린다.
어쩌면 네덜란드의 하늘은 창조주가 자신의 표정을 가장 리얼하게 드러낸 곳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연의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방식으로 읽느냐는 화가의 마음에 달렸
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일찍이 "예술에 반영된 자연은 언제나
예술가 자신의 마음,취향,희열 등 작가의 개성이 반영된 것"('미술 이야기' 제20장)
이라고 말해 그와 같은 자연 해석자로서의 화가 역할을 강조했다.
풍경에 가장 먼저 마음을 담은 사람들은 아마도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곳의 화가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에 처음 풍경화가 출현한
배경은 심미적인 동기보다는 사회경제사적인 측면과 관계가 깊다.
스페인과의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1609년 휴전협정을 체결한 네덜란드는 이를 계기로 유럽의 정치 · 경제 · 문화적
강국으로 발돋움한다. 이때 일어난 경제적 변화 중 두드러진 것 가운데 하나는 시민계층 성장에 따른 부동산 소유권의 변화였다.
이는 개개인의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등록할 장치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시각적 측량술을 동원해 소유지의 전경을 그린 지형도였는데 이것은 종전의 지도 제작 원리에 풍경화의
기법을 결합한 것이었다.
이 같은 지형적 풍경화 중엔 제법 볼 만한 것들이 많았다. 이에 일부 토지 소유자들은 화가들에게 자신의 집안에 걸어 재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좀 더 장식적이고 시각적인 쾌감을 주는 지형도를 주문했다. 이렇게 해서 지형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풍경화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장르는 지식 교양 계층으로부터 상징성과 우의적 교훈이 결핍된 저급한 '베끼기' 예술로
비난받았다.
네덜란드의 풍경화가들이 한결같이 사실적 재현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루이스달이라는
화가는 풍경에 자신의 마음을 담으려 했다.
루이스달은 1628년 암스테르담 인근에 자리한 튤립의 도시 하렘에서 태어났다. 그는 저명한
풍경화가인 살로몬 반 루이스달의 조카다. 그의 풍경화는 살로몬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낸 루이스달은 1646년 아버지와 함께 네덜란드 동부와
서부 독일을 여행했는데 이때의 자연에 대한 경험과 사생은 화가로서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648년 그는 불과 20세의 나이에 길드의 멤버가 됐고 1656년에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평생 머물게 된다. 일설에 따르면 루이스달은 외과의사로 생계를 꾸렸다고 하는데 그만큼 화가로서의 삶이 녹록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의 풍경화는 현실의 풍경을 토대로 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시적이고 드라마틱하다. 동시대의 다른 풍경화가들이 특정한
지형을 판박이하는 데 매달리고 있을 때 그는 치밀한 구성과 능숙한 붓질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그의 화면 구성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독특하다. 그림의 3분의 2가 하늘이다. 땅보다는 하늘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오죽하면
구름 묘사에 치중한 그의 풍경화를 클라우드스케이프('구름 경치')라고 했을까.
변화무쌍한 구름의 파노라마를 묘사한 루이스달의 하늘은 시각적 쾌감을 불러일으키고 지상의 풍경은 낮게 설정된 지평선 아래
3분의 1 정도의 공간 속에 살며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1670년께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비지크 비즈 두르스테데 인근의 풍차'는 그의 전형적인 화풍을 보여주는 걸작 중 하나다.
비지크 비즈 두르스테데는 라인강 하류 지역으로 유트레흐트주에 속한 곳이었다.
그림을 보면 구성이 아주 단순하다. 오른쪽으로 라인강의 야트막한 사구 위에 풍차가 서 있고 그 주변으로 교회를 비롯한
몇 채의 건물이 보인다. 왼쪽엔 잔물결이 이는 라인강 위에 돛배가 정박해 있다.
이 단순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시적인 감흥과 함께 마음의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화면 상단을 넓게 차지하고 있는 구름
가득한 하늘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비를 몰고 올 듯한 먹구름 무리는 타원형의 호를 그리며 풍차 주변을 감싸고 있고,거대한
기념비처럼 우뚝 서 있는 풍차는 심술 사나운 자연에 저항하는 영웅 같다. 오른쪽의 세 여인은 그러한 풍차의 영웅적 자태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루이스달은 격정적인 하늘에서 자연의 마음을 읽었다. 나아가 하늘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도 일찍이
터득한 듯하다. 그렇게 읽어낸 자연의 마음을 자신의 시적 감성에 실어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갈대 같은 우리의 마음이 그
로맨틱한 풍경에 어찌 반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루이스달의 그림이 시공을 초월해 소리 없는 시로 다가오는 이유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
네델란드" 바로크 미술 화가" (루이스달) Jacob Isaackszon van
Dutch painter (c. 1628-1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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