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9.12.13. 00:32
김정은 지시에 날벼락 맞은 주민들
백두혈통 아닌 후지산·한라산 줄기
출생 비밀 드러날까 우상화도 중단
한겨울 ‘백두혈통’ 띄우기 뭘 노리나
연초 기세등등하게 ‘연말 시한’을 제시하며 미국에게 “새로운 계산법을 가져오라”고 강조했지만, 자승자박의 형세로 돌아왔다. 평양의 외교 라인이 총동원돼 연일 워싱턴을 향해 담화 메시지를 날려보지만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의 “우리(북)는 더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란 대미 ‘엄포’를 접하니 짠한 마음까지 들 정도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백두산을 찾은 김정은 위원장은 백마 타기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는 왜 한겨울 해발 2744m의 한반도 최고봉에 올랐을까.
북한의 청년·학생과 노동자 등 주민들이 올겨울 치러내야 할 전적지 답사는 이전과 차원이 다를 듯하다. 김정은이 답사를 형식적으로 하거나 관광식·유람식으로 치르지 말라고 엄중 경고한 때문이다. “꽃피는 봄날에 오면 백두산의 넋과 기상을 알 수 없다”는 게 김정은의 주장이다. 살림살이가 빠듯한 대부분의 주민들로선 제대로 된 방한복이나 신발을 챙겨가지 못하는 건 물론이다. 유사한 겨울 답사 행사에 참여했던 탈북자들은 “손발이 동상으로 얼어 터지는 건 예사”라고 입을 모은다. 도대체 1930~40년 대의 소위 항일 유격대식 체험을 왜 그대로 답습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하는지 모른 체 동원돼야 했다는 것이다.
김정은의 백마 타기 퍼포먼스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다. 한창 한 해를 마무리하고 경제 성패와 대미 협상, 남북 관계 득실을 결산해야 할 시점에서 간부들을 대동한 백두산행은 실속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부인 이설주와 당 간부까지 모닥불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모습은 정교한 연출 의도에도 불구하고 외부 세계의 시각에선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장군님 백말 타고 달리시네’라는 식의 우상화나 찬양은 김일성·김정일 시대로 족하다는 얘기다. 35살 청년 지도자 김정은은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현실 정치에 자신감이 없거나 꼬여버리면 상징 조작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북·미 관계나 남북관계, 경제 문제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은 데 따른 답답함이라면 다른 해법을 찾는 게 좋다.
삼지연 방문을 계기로 김정은의 백두산 챙기기는 가속도가 붙고 있다. 그는 내친김에 삼지연을 군(郡)에서 시(市)로 승격시켰다는 게 지난 11일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다. 삼지연읍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호를 딴 광명성동으로 바꿨고, 김일성의 항일 운동 근거지로 선전되는 백두산 밀영의 이름을 딴 노동자구를 ‘백두산밀영동’으로 바꾸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도시 발달 상태나 주민 숫자 등은 고려하지 않은 정치적 행정구역 개편이다.
사실 김정은의 경우 백두산과 거리가 있다. 출생과 성장은 물론 후계자나 최고 지도자로 자리 잡는 과정이 백두산과 아무런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외가는 한국과 일본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제주 출신인 외조부 고경택은 일제시대 오사카로 건너가 군수 업체인 히로타 군복 공장 간부로 일했다.
그때 낳은 딸 중 하나가 김정은의 생모인 고용희(2004년 사망)다. 북송선을 타고 입북한 뒤 정착해 김정은을 출산한 곳이 강원도 원산으로 알려져 있다. 10대 시절 김정은은 형 정철, 여동생 김여정과 함께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에서 6년 정도 공부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김일성 사망 이후 몰아닥친 대홍수로 북한 주민이 대량 아사 사태를 겪던 시절을 해외 조기 유학으로 보낸 것이다. 간부와 주민들 사이에 “우리 원수님은 백두혈통이 아니라 후지산·한라산 줄기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사정에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백두산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찾을 새 길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자작나무 숲을, 전나무 밀림을 걸으며 잠시 생각에 빠져볼 수 있겠지만 답을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거기엔 과장된 무장 투쟁과 조작된 김정일 출생 신화만이 있기 때문이다. 소련군 대위 김일성이 하바로프스크 브야츠크 병영에서 낳은 ‘1941년생 유라 킴’은 ‘1942년 백두산 출생 김정일’로 탈바꿈했다.
이제 ‘백두혁명’ 운운하며 내세워온 허황된 개국신화는 멈췄으면 한다. 혁명박물관에 보내 조작과 분식에 가담했던 빨치산 원로들이 무덤 속으로 가져가게 하는 게 맞다. 그래야 새 길을 찾을 수 있다. 그 첫 발걸음은 역시 민생이다. 집권 첫해인 2012년 4월 공개 연설에서 “다시는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언한 걸 이제 실천에 옮겨야 한다. 노동당과 내각 간부들의 보고서만 받아볼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장마당을 나가보라. 용기를 내기 어렵다면 암행 시찰도 좋다. 거기에 경제 문제 해결의 답이 있다. ‘미래’ 브랜드의 화장품 6개 세트가 36만원이 넘고, 이걸 사려면 북한 근로자가 10년 월급(평균 월급 3000원 기준)을 꼬박 모아야 하는 기막힌 현실을 풀어야 북한 경제의 회생이 가능하다.
또 하나의 새 길은 서울행에서 찾아야 한다. 지난해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서울 답방을 지킬 때가 됐다. 지난 11월 부산 한·아세안 정상회의 초청이 다자무대 첫 데뷔라 마뜩잖았다면 문재인 대통령과의 서울 4차 정상회담으로 남북 관계를 복원하는 것도 좋다.
누구보다 북한과 김정은 위원장을 아끼고 챙겨주려 한 문 대통령에 막말 비난은 맞지 않는다. 찌푸렸던 얼굴을 갑자기 웃음으로 바꾸려면 계면쩍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해 여동생 김여정을 서울에 보내고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게 한 결단력이면 가능하다. 기왕이면 제주에도 들려 봉개마을의 외조부 묘소를 참배하고 외가 친지들을 만나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런 결단과 노선 변화가 2020년 신년사에 담길 때 김정은 체제의 북한은 기사회생할 수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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