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12.07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연말이 다가오면서 회식 자리가 늘고 있다. 지난주 토요일 내가 다니는 대학원에서 망년회를 했다.
1차를 마치고 사람들이 2차에 가자고 팔을 끌었지만 사양했다.
아직도 1, 2차로 자리를 옮겨 가며 마시는 한국의 술 문화가 익숙하지 않다.
북한은 겨울에 너무 추워 한자리에 눌러앉아 몇 시간씩 떡이 되도록 마신다.
겨울에 식당이나 친구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취하면 그 자리에서 하룻밤 자게 한다.
집으로 돌아가다 얼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술 마시고 대리 운전 기사를 불러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을 것이다.
망년회에 술이 빠지지 않는 건 남북한이 비슷하지만 술자리 위계질서는 북한이 훨씬 보수적이다.
직장 동료가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면 상급자가 서두에 훈계 삼아 건배사를 한다.
남한에서는 다양한 건배사가 나오는데 북한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영생을 기원하여,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이 잔을 듭시다'라고 정중하게 해야 한다.
'약주 좀 하십니까' 한국서 처음 들어 몸 보신하려고 약 탄 술인 줄 알았다
술자리 용어도 좀 다르다. 한국에서의 '원 샷!'을 북한에서는 '쭉 냅시다' '잔을 비웁시다'라고 한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약주 좀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약주'라는 표현이 낯설었다.
몸이 허약해 술에 약을 타서 장복하느냐는 말인 줄 오해했었다.
술을 섞는 문화도 다르다. 한국에선 '소맥' '양폭' 등 칵테일처럼 술에 술을 타서 마시는데
북에선 소주나 맥주 중 한 가지만 마신다.
한국에선 첨잔을 안 하는데 북한에선 상대방 잔이 어느 정도 비면 첨잔하는 게 예의다.
웃어른과 술 마실 때는 몸을 돌린 뒤 술잔을 비우는 풍경도 특이했다.
북에서는 몸을 돌리지 않고 약간 고개를 숙이고 마시면 된다.
위생상 불결하다고 잔은 돌리지 않으나 상급자가 자기 잔에 술을 따라 주면 무조건 잔을 비워야 한다.
북한에서 술은 스트레스를 푸는 기본 수단이다. 특히 좋은 위스키나 보드카와 같이 외국 술이 생기면 취할 때까지 마신다.
술주정을 해도 대체로 관대하다. 동료끼리 술을 마실 때 주량을 조절하면서 적당히 마시면 마음을 열어 놓지 않는 것이라며
핀잔을 준다. 아직도 '주량은 도량이다' '술이 남자의 그릇을 평가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술 한 잔 들어가면 가슴에 품었던 말들을 쏟아낸다.
아내들은 남편이 술을 마시다가 당국을 비난하는 실수를 범할까 봐 걱정한다.
김씨 가문은 다들 애주가로 알려졌지만 김정은도 술을 잘 마시는지는 잘 모르겠다.
판문점 정상회담 만찬 당시 얼굴에 금방 취기가 어린 것으로 보아 술이 그리 세지는 않아 보인다.
김정은의 형 김정철과 런던 호텔에서 3박 4일을 함께 보낸 적이 있는데 그 역시 술은 적당히 마셨다.
김정일은 생전에 고위 간부들의 속마음을 떠보려고 양주 등 독한 술을 마시는 심야 술 파티를 자주 벌였다.
김정은이 간부들과 심야 파티를 자주 벌인다는 소문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간부들과 평양 주민 대다수는 식료품 공장이나 주류 공장에서 생산한 술이나 맥주를 마시지만 지방에서는 '농태기'
(집에서 몰래 만든 술)를 많이 마신다. 농태기에 불을 붙여 파란불이 붙으면 도수가 25~28도 정도로 좋은 술로 평가된다.
하층 주민들은 주로 이웃이나 직장 동료와 마신다. 술의 품질보다는 양을 우선한다.
반면 고위층은 술을 자주 마시지 않는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하고만 술자리를 한다.
김정은 시대 들어와 음주 문화를 '술풍(風)'으로 규제하고 이를 근절하기 위한 대대적 캠페인을 몇 번 벌이기도 했다.
군대 간부들은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충성 서약'까지 했으나 군대에서 술풍을 없애지 못했다.
한국에서 한때 처형설이 나돌았던 김정은의 최측근인 국무위원회 마원춘 설계국장도 술 때문에 지방으로 좌천됐다가
다시 올라왔다.
통일이 되면 북에서도 대리 운전이 생길까. 남한보다 술 좋아하는 북한에서 유망 직종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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