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대구의 품격'

바람아님 2020. 3. 6. 13:05

(조선일보 2020.03.06 이동훈 논설위원)


공포가 덮친 도시는 을씨년스럽고 음울하다.

카뮈의 '페스트'에 등장하는 북아프리카 항구 오랑은 죽은 쥐가 나타나면서 아비규환으로 변해간다.

나를 해칠 바이러스를 품고 있을 상대에 대한 불신, 나만은 살아야 한다는 절규가 증폭되면서 도시는 지옥이 된다.

'코로나 발원지' 중국 우한이 그러했다.

대구시 홈페이지에 코로나 확진자 수를 알리는 그래프도 숨가쁠 정도로 가팔랐다.

바리케이드 쳐진 삭막한 유령도시가 연상됐을 정도다.


▶그런 상상을 하며 대구에 갔을 미국 ABC방송 기자 눈에 비친 대구 풍경은 전혀 달랐던 모양이다.

그는 "이곳에는 공황도, 폭동도, 혐오도 없다. 절제와 고요함만 있다"는 말로 칼럼을 시작했다.

그러고 "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뉴노멀이 된 지금, 대구는 많은 이에게 삶의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마무리했다.

대구 현장에서 취재 중인 동료에게 전화해보니 외신 기자의 묘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시장도 교통도 병원도 조용하고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잔뜩 겁에 질려 서울에서 내려온 한 공무원은 며칠 지나 말했다고 한다.

"도시가 마치 동면하듯 조용히 숨쉬고 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대탈출도 없었다. 대구에 있는 부모에게 타지에 있는 자식이 "당장 빠져나오시라"고 해도 요지부동이다.

"뭐 하려고 자식까지 고생시키냐" "민폐 끼치기 싫다"고 한다.

한때 정권은 '대구 봉쇄'를 검토했는지 모르지만 대구 시민은 스스로 출입을 자제하고 있었다.

대신 출향 인사들이 대구로 달려왔다. 특히 방역에 보탬을 줄 수 있는 이곳 출신들이 적극적이었다.

외지에서 들어온 의료인이 500명도 넘는다.


▶사재기도 없었다. 비슷한 우려를 담은 보도가 나오면 시민들은 "평소와 똑같다. 왜곡하지 말라"며 불쾌해한다.

일주일째 마스크 사러 늘어선 긴 행렬 속에서도 큰 목소리 한번 들리지 않는다.

고생하는 의료진에게는 병원마다 도시락, 빵, 과일 같은 위로 물품이 쌓인다.

어떤 모텔은 건물 한 동을 비워 외지 의료인에게 내놓았다.


▶자영업자를 돕기 위해 임대료를 내려 받거나 유예하는 '착한 건물주 운동'도 확산되고 있다.

경증 환자는 '나는 그나마 낫다'며 자발적으로 병실을 양보한다. 서로 이기심을 내려놓는다.

'사람의 인격'이란 오히려 위기에서 드러나듯 '도시의 품격' 또한 극한 상황에서 확인된다.

카뮈는 재앙에 맞서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했다.

현실에서 그것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 지금 대구다.

품격 있게 바이러스와 싸우는 대구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06/2020030600050.html 




[만물상] #대구 힘내라
(조선일보 2020.02.26 정권현 논설위원)


해방 직후 1946년 대구에 콜레라가 들끓었다.

귀국 동포를 따라온 콜레라균이 그해 5월 경북 청도군에서 첫 환자를 냈다.

이어 대구에서만 환자 2500명이 생겨 1700명 넘게 숨졌다. 전국 최고 사망률이었다.

화장터로 안 돼 공동묘지에 장작을 쌓고 그대로 태우는 광경도 있었다. 다급해진 미 군정은 대구 출입을 봉쇄했다.

식량 공급이 끊겨 아사 위기에 몰린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고 좌익 세력까지 준동했다.


▶대구·경북 어르신들은 이번 우한 코로나 사태로 직격탄을 맞으면서 그때 비극을 이구동성 입에 올린다.

지금 대구는 '유령도시'처럼 변했다. 일상은 무너진 지 오래다. 인적마저 끊기고 시민들은 패닉에 빠졌다.

마스크를 사려고 줄 서 기다리는 시민들 표정에는 불안과 공포감이 서려 있다.

500년 된 서문시장이 처음으로 문을 닫았다.

국채보상운동 기념일인 지난 21일부터 2·28 민주운동 기념일까지 예정됐던 시민 주간 행사도 취소됐다.

[만물상] #대구 힘내라


▶'대구 봉쇄' 얘기가 74년 만에 다시 나왔다.

방역 당국이 '대구 코로나'라는 표현을 썼다가 사과하더니, 25일엔 청와대·정부·여당이 모인 회의가 끝나고

"대구 봉쇄" 운운하는 발표가 나왔다. 시민들이 느꼈을 공포와 분노가 쉽게 짐작이 간다. 지금 인터넷에는

실시간 검색어로 '대구 코로나' '대구 신천지'라는 단어가 동시에 뜬다. 악성 비아냥도 더러 보인다.


▶그러나 대구·경북 주민들은 '봉쇄' 운운이 나오기 전에 이미 스스로 외부와 격리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음식점은 물론 상가도 솔선해 문을 닫았다. 성당·교회·사찰은 종교 행사를 멈췄고 외부인 출입도 막고 있다.

이웃을 배려하는 모습이다. 서문시장의 어떤 건물주는 월세를 아예 받지 않기로 했다. 무료 방역에 나선 업체도 있다.

대구 학생들은 우한 코로나 관련 정보를 담은 인터넷 홈페이지와 앱을 만들어 운영한다.

'#대구 힘내라' '#대구 파이팅!' 같은 해시태그가 숱하게 올라왔고, 연예인들 기부도 잇따르고 있다.


▶대구·경북은 코로나 방역의 마지노선이다. 여기서 못 막으면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대구·경북은 위기에서 빛이 났다.

일제강점기 국채보상운동의 깃발을 올릴 때도, 6·25전쟁 당시 낙동강 마지노선을 사수(死守)할 때도 그랬다.

어린 소년·소녀들까지 총을 잡고 전선으로 나갔다.

대구·경북은 이번에도 꿋꿋하게 버티고 이겨낼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2/25/202002250428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