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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 명작 기행] (24) 요제프 안톤 코흐 '슈마드리바흐 폭포'

바람아님 2014. 2. 12. 10:21
하얗게 흐르는 알프스 만년설, 빽빽한 침엽수 병풍 아래 목동의 시간은 詩가 되고…

니콜라 푸생의 화풍 계승…20대 방랑시절에 스케치
대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 전형적인 삼단구도로 그려내


중세 말 이탈리아 대화가 치마부에는 시골길을 가던 중 우연히 한 양치기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은 바위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솜씨가 여간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그 길로 소년의 아버지를 설득,자신의 아틀리에로 데려가 당대 최고의 화가로 키워냈다. 이 소년이 바로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조토다.

18세기 후반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의 산악지대에도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한 양치기 소년이 있었다. 요제프 안톤 코흐(1768~1839)였다. 그 역시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그림솜씨를 지니고 있어 조토처럼 누군가에 발탁될 수밖에 없는 행운을 타고났다. 그는 소와 양을 치는 틈틈이 목탄으로 바위나 나무표면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곳을 순시하던 아우크스부르크 주교의 눈에 들어 본격적인 미술 수업의 행운을 잡게 된다.

15세에 기숙학교에 입학한 소년은 졸업 후 슈투트가르트의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정신을 타고난 이 재능꾼은 고루하고 틀에 매인 대학 교육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당시 전 유럽을 들끓게 했던 프랑스 대혁명을 지지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은 데다 학교시책에도 반기를 들어 1791년 정학처분을 받는다. 그는 스트라스부르로 달아나 자코뱅당에 가입한다. 그러나 정치 역시 그의 기질에 맞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그의 창조적 영혼은 집단적 가치에 따르길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타고난 '웬즈데이스 차일드'(고뇌를 타고난 아이)였다.

이후 3년 동안 그는 알프스의 산악지대를 방랑하며 수백 점의 풍경을 사생한다. 이때 매료된 것은 유럽 지붕의 영웅적인 자태였다. 그는 새삼 자연의 위대성,웅혼한 기상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 속에서 그는 위대한 신의 존재를 느꼈다. 그것은 편협하고 틀에 매인 학교 교육에서는 결코 체득할 수 없는,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이었다. 이를 계기로 대자연의 영웅적 기상을 담는 풍경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의 결심이 구체화되는 것은 로마에 영구 정착한 1810년대부터였다.

사실 코흐 당시만 해도 풍경화가가 된다는 것은 3류 화가의 길을 걷는 것을 의미했다. 니콜라 푸생,클로드 로랭 같은 선배 화가들 덕분에 풍경화에 대한 인식이 개선된 것은 사실이지만 미술의 변방인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선 여전히 홀대받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몇 가지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질학의 발전과 함께 지리적 자연이 과학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북유럽 귀족들이 이탈리아로 그랜드 투어를 떠날 때 중간 여정으로 스위스의 산악지대를 거치게 되면서 대자연의 때 묻지 않은 아름다움을 재발견한 것이다.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에 의해 촉발된 자연에 대한 철학적 관심도 한몫했다. 이렇게 변화된 환경은 산악 풍경화의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계기가 됐고,덕분에 풍경화에 대한 인식도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코흐가 풍경화가가 되기로 한 데에는 이런 시대적 추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코흐의 풍경화는 니콜라 푸생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본 블로그 2013년 7월29일자 참조).푸생의 '영웅적 풍경화'는 있는 그대로의 외형적 자연이 아닌 엄정한 논리적 질서를 지닌 본질적인 자연을 그리는 것이었다. 화가는 자연에서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그것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변형했다. 그 영속적인 무대 위에 덧없는 인간의 삶을 펼쳐 보임으로써 현세의 순간성과 불변하는 대자연의 웅혼한 기상을 대비시켰다.
그러나 코흐는 푸생의 풍경화처럼 자연을 변형하지 않고 여기에 과학적 사실성과 시적인 정서를 덧붙였다. 1822년에 그린 '슈마드리바흐 폭포'는 이 같은 화가의 입장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대의 방랑시절에 그린 스케치를 토대로 제작한 것이다. 무대가 된 슈마드리바흐 폭포는 몽블랑의 발아래 라우터브루넨 계곡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폭포 중의 하나다. 이 계곡에는 크고 작은 70여개의 폭포가 모여 있는데 우리에겐 그중 슈타우프바흐 폭포가 잘 알려져 있다. 이 폭포는 305m의 거대한 물줄기가 수직으로 떨어져 그 높이가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데 비해 코흐가 화폭에 담은 슈마드리바흐 폭포는 중심의 굵은 물줄기와 함께 좌우 여러 갈래의 폭포들이 합쳐져 그 장려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작품은 전형적인 삼단구도로 이뤄져 있다. 상단에는 알프스의 만년설에서 발원한 슈마드리바흐 폭포가 거대한 석회암 절벽에 물안개를 일으키며 떨어진다. 중경에는 원시적인 대자연을 감싸안은 듯 침엽수림이 빽빽이 자리잡고 있고 폭포수는 그 사이에서 하나의 물줄기를 이루며 라우터브루넨 계곡으로 흘러들어간다. 하단의 개천 사이에는 염소 치는 목동을 그려 넣어 시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킴과 함께 대자연이 인간의 삶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 존재의 하찮음과 덧없음을 자각하고 대자연 앞에 고개를 숙인 코흐의 자세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알았던 서구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자기반성이자 무언의 경고처럼 보인다. 그의 겸허한 마음에서 천지인(天地人) 합일의 동양정신을 읽었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정석범 < 미술사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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