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물려받은 할아버지의 미술품 1만여 점을 팔기로
결정했다는 마리나 피카소의 기사를 읽었다. 그래도 이기적인 할아버지와는 달리 손녀딸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림 판 돈을 쓰겠다 한다.
문득 그림이 벽마다 걸려 있던 어릴 적 옛집이 떠올랐다.
부모님 두 분이 다 그림을 좋아하셔서, 어릴 적 우리 집엔 그림이 많았다.
그중에서 기억나는 건 내 방 벽에 오래도록 걸려 있던 천경자 화백의 여인을 그린 그림과
거실에 걸려 있던 김환기 화백의 달 항아리 그림이다.
어머니는 생각보다 집 형편이 넉넉지 못하자 두 그림을 팔아 우리 남매의 유학 자금에 보태셨다.
헐값에 판 그 그림들이 경매에서 몇억을 호가하는 걸 보며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네 그림이 앞으로 그렇게 비싸지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
내 그림이 그렇게 비싸지면 피카소의 손녀딸처럼 세상의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모두 쓰겠다는 나의 희망은 아직도
유효하다. 사춘기 시절 내 방에 걸려 있던 천경자 화백의
그림에 위로를 받으며 나는 어른이 되었다.
우연히 나는 아주 오래전 내 방에 걸려 있던 그 그림이
진품인지 아닌지 감정을 해준 적이 있다.
어릴 적부터 방에 걸어 두었던 그림이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마치 피치 못한 사정으로
헤어진 가족처럼 나는 그 그림을 보자마자 목이 메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서, 그 그림이 걸려 있던
내 어린 날의 옛집이 생각나서였다.
살던 집터가 없어지고 그곳에 살던 사람이 사라져도
그림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몇 대를 이어간다.
어머니가 육십여 년 전 당신을 짝사랑하던 사람으로부터
받은 작은 그림을 누군가에게 줘버렸는데 알고 보니
그게 이중섭의 은박지 그림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걸 만 번도
더 들었다.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네가 누군가에게 선물한 작은 그림도 어느 날 그렇게 될지 모를 일이지. 너 때문에 덕 보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으냐?"
죽을 때까지 잊지 말아야 할 어머니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