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옛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진 8폭 병풍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배우들 옷차림이 해괴하고 망측하다/
동방의 장대타기는천하에 없는 거라/
줄타기와 공중제비 하며 거미처럼 매달렸다/
한 곳에선 꼭두각시 무대에 올라오자/
동방에 온 칙사(勅使)가 손뼉을 친다/원숭이는 아녀자를 깜짝 놀라게 해/
사람이 시키는 대로 절도 하고 꿇어도 앉네.’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1750~1805)가 당시 한양 거리와 시장을 묘사한 시다. 광대와 사당패
공연이 펼쳐지는 듯하다. 원숭이가 나와 구경꾼들로부터 돈을 받는 듯한 장면도 흥미롭다.
이는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의 일부다.
‘성시(城市)’는 도시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이지만 여기선 18세기 한양을 의미한다. ‘성시전도(城市全圖)’라는 그림을 보면서 지었다고 해서 ‘성시전도시’라 불린다. 18세기 조선 한양을 그린 ‘성시전도’라는
그림과 시가 모두 존재했던 것인데, 이는 모두 정조 임금의 명에 따라 이뤄졌다. 기록만 전하던
‘성시전도시’ 12편을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가 찾아냈다. 박제가의 시는 그 중 하나다.
1792년 4월 24일 임금 정조는 규장각 문신들에게 ‘성시전도’를 보고 장편의 시를 사흘 안에 써낼
것을 명한다. 시를 제출하자 정조는 등수를 매겼다. 병조정랑(兵曹正郞) 신광하가 1등, 검서관(檢書官)
이던 박제가는 2등이었다. 검교직각(檢校直閣) 이만수와 승지 윤필병이 각각 3·4등을, 검서관 이덕무과
유득공은 공동 5위였다. 상을 받은 이는 17명이었고, 포상자가 아니면서도 관련 시를 남긴 이들도 있다.
안 교수는 “‘성시전도’라는 동일한 제목과 주제 아래 여러 편의 시가 다른 사람에 의해 동시에 씌어진
희귀한 사례”라며 “12편 이외에 더 많은 시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 작업을 2009년부터
해온 안 교수는 이에 관한 논문을 ‘문헌과 해석’ 봄호에 발표할 예정이다.
이 시들에서 세태를 비판하는 정서는 보이지 않는다. 왕의 명에 따라 지은 시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도시를 묘사하는 시각 차이는 드러나는데, 안 교수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눴다. 하나는 한양의 풍광을
중국의 옛 제도·지명과 연관시켜 묘사하는 것이다. 1등을 차지한 신광하의 시가 해당한다.
둘째 부류는 한양의 궁궐과 관아, 고관 행차 등을 단조롭게 그려낸다. 셋째는 박제가의 경우처럼 생동감
있는 거리와 시장에 주목하는 부류다. 안 교수는 “정조는 이 그림과 시로 도성 밖 민간의 삶을 살피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도성 정비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시는 나왔지만 ‘성시전도’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8폭 병풍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와 유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