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 : 1705-1777 시대 : 조선 분야 : 문학 > 문필가 > 문인서화가
이광사(李匡師)에 대하여
이광사(李匡師)
1705(숙종 31)∼1777(정조 1). 조선 후기의 문인서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또는 수북(壽北).
예조판서를 지낸 진검(眞儉)의 아들이다.
소론이 영조의 등극과 더불어 실각함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였으며, 50세 되던 해인 1755년(영조 31) 소론일파의 역모
사건에 연좌되어 진도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陽明學)을 배웠고, 윤순(尹淳)의
문하에서 필법을 익혔다.
시·서·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특히 글씨에서 그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圓嶠體)를 이룩하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림은 산수와 인물·초충(草蟲)을 잘 그렸다. 인물에서는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畵風)의 고식(古式)을 따랐으나, 산수는
새롭게 유입된 오파(吳派)의 남종화법(南宗畵法)을 토대로 소박하면서 꾸밈없는 문인취향의 화풍을 보였다.
대표작으로 〈행서4언시 行書四言詩〉(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와 1746년 오대(五代)의 인물화가 왕제한(王齊翰)을 임모하여
그렸다는 〈고승간화도 高僧看畵圖〉(간송미술관 소장)와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으며, 서예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원교서결 圓嶠書訣》을 비롯하여 《원교집선 圓嶠集選》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광사가 유배지에 자결한 부인 문화유씨를 그리워하며 지은 글이다..
영영 이별한 뒤 봄도 지나고 여름도 다 가 버렸소 서리 바람이 쌀쌀한데 옥체는 펀안하시요 시부모 계신 복된 땅 가까이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아침저녁 받들어 모시어 지난날 다하지 못한 정을 풀고 있겠구려
효성스러운 아들아이가 먼 이곳까지 찾아오면서 친척들이 쓴 편지를 함께 가져왔소 상 위에 내려놓으니 한가득이오 오직 당신 것만 한 글자도 없고 내가 쓴 답장 또한 당신에게 부치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이요
창자는 마디마디 끊어지는 것 같고 눈물은 강물이 쏟아져 내리듯 흐르오 살아서 혼이 끊어지기보다는 차라리 죽어 한무덤에 묻히는 편이 낫겠소 어서 죽기만을 간절히 기도하지만 하늘은 이 소원마저도 들어주지 않소 낮과 밤은 어찌 이리도 길단 말이오 삶이 정말 괴롭소
한이불 덮던 사랑도 끊어지고 사랑스런 자식들과도 영영 헤어지고 말았소 집터를 꼼꼼이 살펴 지은 좋은 집을 버리고 사람 없는 텅빈 산으로 가니 잡초만 가득한 벌판에 간간이 괴이한 새만 우짖소 쓸쓸한 바람과 차가운 비가 밤낮으로 번갈아 일어나는데 부인은 깊은 무덤에 홀로 누워 해와 달도 못 보는구려
영혼이 깨어나서 만약 부인과 내가 한자리에 앉을 수 있다면 이승에서 맛난 음식 함께 맛보며 다시 즐길 수 있을까요? 그윽하고 고요했던 모습 바르고 정숙했던 태도를 이승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이제 누가 있어 내가 좋아하는 것 정성껏 마련해주며 내가 필요한 것 챙겨 줄까요? 누가 있어 나의 잘못을 바로잡아주며 의심나는 것은 누구에게 물어볼까요? 해도 달도 별도 시들지만 내 가슴에 쌓이는 한은 사그라지지 않소
아들아이가 돌아가는 길에 내 슬픔을 적어 당신의 빈소에 고하고 무덤 앞에서 다시 읽고 태우라고 하였소 바라건대 밝고 환한 넋이 와서 듣고 늙은 홀아비의 정을 측은히 여겨 주시오 눈물이 먹을 적셔 글이 써지질 않는구려..
이광사가 유배지에 자결한 부인 문화유씨를 그리워하며 지은 글이다 그리움은 시간이 지난다고 희석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견딜 수밖에... 이 남정네의 한이 얼마나 깊었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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