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지하철 낙서

바람아님 2015. 3. 18. 09:55

(출처-조선일보 2015.03.18  이명진 논설위원)

과거 뉴욕 지하철은 탈 게 못 됐다. 
한 해 60만건씩 강력범죄가 발생하는 '범죄 도시' 뉴욕의 대표적 우범지대였다. 
역무원들도 부스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냈다. 
1980년대 뉴욕시 교통국장 데이비드 건은 지하철을 가득 채운 낙서에 주목했다. 
5년에 걸쳐 역과 6000대 넘는 객차를 청소했다. 그랬더니 지하철 범죄가 75%나 줄었다.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다간 심각한 결과를 부른다는 범죄심리학 이론 '깨진 유리창 법칙'을 활용한 사례다.

▶기차역과 건물 벽, 교각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리는 그림과 낙서를 그래피티(graffiti)라고 한다. 
뉴욕뿐 아니라 세계 웬만한 대도시가 '그래피티 공해'로 몸살을 앓는다. 
LA는 상가 건물과 아파트는 물론 주택 외벽 마감재까지 스프레이가 묻지 않는 재질을 쓰도록 의무화했다. 
캐나다 밴쿠버 학교들은 밤에 건물 벽에 접근하는 사람에게 물벼락을 퍼붓는 장치를 달았다. 
독일 철도회사 도이치반은 낙서꾼이 자주 오는 역에 무인기 드론을 띄우고 있다.


	[만물상] 지하철 낙서
▶그래피티는 60년대 뉴욕 빈민가에서 시작해 세계로 퍼져 나갔다. 
갱들이 영역을 표시하는 수단으로 쓰다 차츰 사회·정치적 비판 메시지를 담았다. 
랩·디제이·비보이와 함께 힙합 문화 네 요소로 꼽힌다. 
'낙서 예술가'도 등장했다. 
스물여덟에 죽은 뉴욕 바스키아의 작품은 재작년 경매에서 164억원에 팔렸다.
 25년째 얼굴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영국인 '뱅크시'의 그래피티를 관광 상품으로 개발한 지역도 있다.

▶들켜선 안 되는 작업이어서 그래피티 세계에선 무엇을 그리느냐만큼 어디에 낙서를 하느냐도 중요하다. 
접근하기 힘든 곳일수록 가치를 높이 쳐준다고 한다. 
낙서꾼들 사이에서 지하철이 '로망'으로 통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밤 몰래 숨어들어가 지하철 객차를 통째로 낙서로 채운다는 뜻의 영화 '홀트레인(Wholetrain)'도 할리우드에서 나왔다. 
외국 얘기인 줄 알았더니 서울 지하철도 그래피티로 비상이 걸렸다. 
재작년 말부터 1년 4개월 사이 낙서 습격을 받은 지하철역이 열일곱에 이른다. 전담 수사관까지 생겼다.

▶지난달 지하철역 세 곳을 연달아 습격한 이들은 힙합 모자와 후드티 차림 백인 4인조였다고 한다. 
매번 새벽에 쇠톱과 절단기로 지하철 환풍구를 잘라낸 뒤 차고지로 들어갔다. 
경찰이 손 쓰기도 전에 호주로 유유히 돌아갔다. 
한국 지하철이 깨끗하다는 소문이 난 것이 '원정 낙서'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분석이 나온다. 
누구 입장에선 무용담이나 예술일지 몰라도 공감을 얻지 못하면 무슨 소용일까 싶다.